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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8점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와이즈베리



2008년의 촛불을 넘어서 



수 백명이 넘는 장병 앞에서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할 때, 사실상 나는 먼저 ‘사회민주주의’라고 하는 낯선 개념을 설명해야만 했다. 냉전의 중심에서, 독재정권과 그들이 휘두르는 메카시즘에 짓눌려 살아온 한국인으로서는 민주주의라고 하면 자유민주주의라고만 생각했지 사회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여간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정훈장교로서 장병들 앞에서 대한민국의 정치제도에 대한 강연을 하고 다닐 무렵, 세계는 미국의 패권이 급속도로 약화되고 중국은 아직 충분히 이빨을 드러내지 못했었다. 그 사이 유럽연합은 빠르게 과거의 영광을 회복해 갔고, 세계적인 학자인 제레미 러프킨은 <유퍼리언 드림>이라는 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평가가 상당히 엇갈릴 수 있지만 참여정부를 이끈 노무현 대통령은 <유러피언 드림>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을 한국 정치사에서 실험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당연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의 정치 상황은 ‘제3의 길’을 합의하에 추동해갈만한 정치 세력조차 명확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 역시 ‘사회민주주의(이하 사민주의)’라는 유럽연합의 멤버들이 주로 도입하고 있는 정치제도에 큰 매력을 느꼈고, 러프킨의 주장을 상당 부분 인용하여 장병들에게 도래할 미래 사회와 대한민국의 전략 포인트를 강의했다. 내가 강의한 내용은 여러 미래학자들이 예견한 바를 토대로 향후 국제 정세는 중국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며, 거대한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연합, 아세안 연합, 아프리카 연합, 북미 연합, 남미 연합, 동아시아 연합 등 지정학적 문화적 관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국가 연합체가 출현할 것이며, 이 연합체들의 주요 정치제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성과 복지국가의 분배 정의가 조화를 이룬 사민주의에 가까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와 당시 미래학자들의 기대는 2013년 현재, 여러가지 면에서 수정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바로 그리스로부터 촉발되어 스페인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유럽연합 클럽의 경제 위기 때문이다. 제3의 길은 지금까지의 결과를 봐서는 명백히 실패한 듯 보인다. 지젝이 <멈춰라, 생각하라>에서 표현한 바대로 자본주의라고 하는 ‘호랑이’를 길들이는 일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다. 


<멈춰라, 생각하라>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브레이비크의 노르웨이 테러, 아랍의 봄, 영국 폭동, 월가 시위 등 서로 다른 층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사의 개별 사건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내며 그곳에서 근본적인 문제, 즉 자본주의의 위기를 도출해낸다. 


모두가 알지만 대부분이 읽어보지는 않았을 책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이미 1867년에 자본주의의 위기와 병폐를 강론한다. 그의 이러한 자본주의 비판으로부터 도출된 ‘공산주의 이론’은 현실 세계에서 1990년대와 함께 명백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 자체가 오류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론>과 현실 공산주의는 지나치게 밀접한 상호관련을 맺고 있었던 탓에, 현실 공산주의의 실패는 곧 마르크스의 판단 오류처럼 대중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후, 자본주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세계를 활보했고, ‘세계화’라는 용어와 함께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세계 곳곳에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본주의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민주주의 없는 선진화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우리가 세계사 시간이나 경제 시간에 배운 것처럼 서구의 근대화와 함께 성장했고, 그 1차적인 기능은 국가의 부를 획기적으로 창출하는 것에 있었다. 이른바 파이를 늘리는 기술로서 자본주의 이상의 생산력 확대 방안은 당시로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에 힘 입어 산업혁명은 진정한 위력을 발휘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은 전 세계의 부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허나, 곧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이라는 것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낭만적 비유를 통해 시장경제의 생태계를 아름답게 묘사하곤 한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시장은 결코 인간의 통제하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장을 조절할 수 있는 이론들을 고안해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일부는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자본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일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마르크스 등의 사상가들이 우려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보다 본원적인 문제는 ‘자본 그 자체의 팽창’을 누구도 멈출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1970년, 제조업을 통한 수출입으로는 더 이상 세계 제1국으로서의 자본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한 미국은 ‘금융자본주의’를 기획한다. 이 거대한 몽상은  실물이 없는 자본을 만들었고, 인간의 인식 속에서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자본을 전 세계로 유통시키며 기묘한 방법으로 자본을 증식시키기 시작한다. 21세기 미국의 금융 위기와 재정 거품은 이미 30여년 전 예견된 것이었다. 그 시점부터 미국은 꾸준히 몰락해오고 있었고, 미국의 많은 지성들은 이미 그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자본을 멈출 수는 없었다. 


자본의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갖고 싶은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소유하도록 광고하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한 돈을 벌게 하고, 돈을 지불하여 상품을 구매하도록 한다. 금융 자본주의는 하나를 추가한다. 갖고 싶은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소유하도록 광고하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돈을 빌리게 하고, 빌린 돈을 갚기 위한 돈을 벌게 하며, 돈을 지불하여 부채를 갚게 한다. 이 작동 원리의 가장 깊은 기저에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소유욕이고, 이 소유욕을 끊임없이 충동하여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확대시키고, 더 좋은 상품, 더 합리적인 상품처럼 보이기 위해 가격을 조절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근원적으로 시장경제라고 하는 자체적인 자본의 생태계에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더 많은 자본을 보유하고, 더 좋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삶으로 귀결된다. 더 많은 자본과 더 좋은 상품을 소유한 인간은 더 좋은 인간이고, 그렇지 못한 인간은 그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자본을 자기 것으로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자본은 마치 중력과 같은 작용을 하여 자본이 많이 있는 곳으로 더 많은 자본을 끌어들인다. 이른 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더욱 노력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고, 진보주의자들은 국가의 개입을 통해 균형을 맞춰줄 것을 요청한다. 양측 모두 ‘당연하게도’ 자본을 없애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마치, 자본이라는 것이 인류 역사와 태동을 함께 한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이라도 되는 듯이. 


역사를 들여다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인류는 ‘자본주의’가 없이도 국가를 잘 운영해왔다. 조선시대의 백성들이 한양에서 새로 출시된 곡괭이를 보기 위해 천리길을 달려오는 일은 없었다. 춘향이가 입고 다니는 옷이 당대의 유행이 되어 모두들 춘향이가 입고 다니는 브랜드가 뭐냐고 문의 전화를 거는 일 또한 없었다. 삶에 관한 대부분의 일들은 각 가정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근본적으로 다른 경우는 고위층 양반들에게 밖에 없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이란 것은 모두가 양반의 지위를 누리는 결과를 지향했지만 오늘날의 사회를 돌아보면 거꾸로 동시에 모두가 노비가 되는 결과를 도출하기도 했다. 우리는 누구도 우리가 생산한 생산물을 우리 자신이 직접적으로 소유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그 생산물을 제공하기(바치기) 위해 노동을 한다. 조선 시대에 남에게 서비스를 주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오직 노비뿐이었다. 자본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면서 우리는 모두 소비할 때는 양반이 되고 노동할 때는 노비가 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금씩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매년 총선이나 대선철이 돌아 올 때면 정치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런 것이 잘 못되었구나, 이런 것을 이렇게 바꾸면 개선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갖고, 선거철이 끝나고 선출된 자들의 패악과 타락과 실패를 지켜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게 된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새 정치’를 주창하기도 하고, 영웅의 출현을 기대해보기도 하지만 정작 특별히 바뀌는 것은 없어 보인다. 


슬라보예 지젝은 브레이비크의 테러에 대한 변론, 아랍의 봄 시위대의 주장, 영국의 폭도들의 외침, 월가를 점령하자고 외쳤던 미국인들의 목소리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들에게 통일된 정치적 지향점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무언가 억압되어 있고, 무언가 잘못되어 있고, 무언가 바꿔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라는 답을 그들은 갖고 있지 않았다. 


2008년의 대규모 촛불 시위는 굉장히 복잡한 양상을 띤 시위였다. 많은 이들이 당시의 촛불 시위를 단순히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 개방에 따른 반작용으로 기억하고 있겠지만, 정작 시위에서 발언대에 오른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이 폭넓은 주제를 이야기했다.  많은 이들이 건강주권의 문제로 시위에 참여 했지만, 세계적인 생태 위기의 관점에서 참여한 사람도, 동물주권의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편, 이명박 정부의 비민주성을 강하게 질타하며 정권 퇴진 운동을 전개하려는 세력도 분명히 결합되어 있었고,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비난하는 자주통일 세력도 시위대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2008년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시위에 참여하여 각기의 목소리를 냈던 것이다. 2008년의 촛불 시위는 건강주권의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굉장히 혁명적 성격의 시위로 점차 발전해가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명민하게 건강주권의 문제만으로 언론을 동원해 시위의 성격을 규정했고, 재빠르게 문제를 해결(유보)해버렸다. - 촛불이 꺼지자 이명박 정부는 다시 조용히 미국산 소고기 수입의 규제를 느슨하게 바꾸어 버렸다. - 


2008년의 촛불 시위는 사실상 미국의 월가 시위에 비견되는 소외된 자들의 총 봉기였다. 허나 월가 시위가 허망한 외침으로 끝나고 말았듯이 촛불 시위 또한 표면적인 성과(미국산 소고기 수입 철회)만을 낸 채로 사그라들었다. 이 시위들이 혁명적인 추동력을 지니지 못한 것은 우리 시대에는 레닌도 이상적인 대안 체제도 없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러시아 민중의 비판적 에너지를 자신의 깃발 아래로 빠르게 흡수해버렸고, 레닌의 이상은 당대 러시아 대중에게 충분한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스탈린은 기껏 모아놓은 생동하는 에너지를 국가 독재라는 구태 속으로 빠르게 소모시키고 말았지만. 


슬라보예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월가점령시위의 수많은 발언들 기저에는 두 가지 기본적 통찰이 깔려 있다. 첫째, 현재 대중의 불만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것이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이지 그 특정한 부패 사례가 아니다. 둘째, 현재와 같은 다당제 형태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월가점령시위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 <멈춰라, 생각하라> 163쪽. -  


마찬가지로 우리는 2008년 촛불 시위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있다. 20008년 촛불 시위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온 대한민국에 대한 온갖 불만은 사실상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지닌 한계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최첨단에 서 있는 국가다. 그 흐름과 유행의 첨단성에 있어서는 이미 일본 경제를 앞지른 지 오래다. 그러나 빠르게 성장한 자본주의의 위력에 비해 자본을 통제할만한 정치력을 갖춘 정치 체제는 서구 사회에 비해 몇 십년을 뒤쳐져 있다. 수많은 실험을 통해 대안을 모색해온 서구 사회조차 자본에 대한 정치적 통제력을 사실상 상실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뒤늦게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모색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유럽연합으로 대표되는 최전선의 사회민주주의도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제어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유럽연합의 것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 않다. 사회민주주의는 기대하는 것만큼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이 울타리를 벗어난 ‘호랑이’를 감당할 것인가. 


보수주의자들은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다. 그저 집권하는 것이, 권력을 쥔 것이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가는 곧 권력을 잃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 민주화’를 내세우며 중도표를 흡수해 당선이 되었다. ‘경제 민주화’는 한 마디로 울타리를 벗어난 저 호랑이를 어떻게 길들일 것이냐는 문제제기였다. 당선 된 이후 예상했듯이 대통령은 호랑이를 길들일 의사가 별로 없어 보인다. 보수주의자들은 자본의 위기를 도덕의 위기로 포장하기 좋아한다. 재벌의 도덕적 해이, 정치인의 부패, 부유층의 이기주의를 잘 조정하고 다독이면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것이라고 선전한다. 대한민국은 정확히 새마을 운동이 지향했던 세상으로 퇴행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책의 제목을 통해서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멈춰라, 생각하라. 


책의 말미에서 지젝은 예수의 메시지를 거론하면서까지 ‘공산주의’의 재래를 점치고 있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현실적으로 실패한 것은 그것이 지나치게 미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가지 저항의 사건들은 미래의 공산주의  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미래의 공산주의는 우리가 종래에 알고 있던 공사주의와는 다를 것이며, 그것이 실현될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다만, 필연적으로 그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 혹은 그러한 방식으로 밖에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한다. ‘공산주의’라는 용어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화들짝 놀랄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지젝의 견해가 지나치게 종교적인 낙관을 띠고 있으며, 공산주의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답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제도 양쪽을 모두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은연 중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자신의 희망을 드러낸다. 스탈린이나 모택동의 독재가 아닌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꿈꾸는 그의 꿈 그 자체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 ‘멈춰라, 생각하라.’라는 그의 구호에 대해서는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그러나 기왕 멈추고 생각하는 김에 우리는 조금 더 길을 멈추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난 총선 많은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던 진보정치의 이합집산은 처참한 결과를 맞이한 채 쓸쓸하게 정치의 메인 스트림에서 퇴장 당했다. 그들 각 정치 세력이 지젝의 구호처럼 충분히 멈추고 생각한 뒤에 일정한 합의를 도출하고 힘을 모았다면 다른 결과를 도출하지 않았을까 싶다. 진보정치의 재구성이 실패하고, 차악이었던 민주당 정권의 집권에도 실패한 지금,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안철수 의원에게 열망을 보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빨리 새 정치의 내용을 선보이고, 서둘러 신당을 창당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안철수 의원은 굉장히 더디게, 차근차근 문제들을 짚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그에 대한 신뢰감을 두텁게 하고 있다고 본다.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안철수 의원뿐 아니라, 개혁을 꿈꾸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소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요청되는 명령이다. 멈춰라. 그리고 생각하라. 



2013. 8. 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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