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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4중주, 죽음과 태어남의 푸가
취향을 이야기하자면 바흐, 모짜르트,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쪽이다. 베토벤은 아니다. 게다가 4중주라니. 나는 영화 속의 로버트처럼 솔로 쪽에 더 관심이 간다. 그러나 '마지막'이란 말은 언제나 간절하다. 그 간절함에 응하여 영화를 관람하고 싶었다.
원래 혼자 보려했던 영화인데, 이런저런 사정들로 실패하고 있던 즈음 우연히도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남자인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본 것은 수 년만의 일이었다. 그것도 블록버스터 액션이 아닌 예술 취향을 드러내는 이런 작품을 함께 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함께 보기로 하는 결정은 무척 간단하게 내려졌다. 그랬다. 친구와 나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난 13년간 삶의 한 부분들을 공유해온 사이지 않은가.
영화의 내용은 많은 소개글과 관람 후기에서 얘기하는 바와 같이 결성 25주년 공연을 앞둔 현악 4중주단의 불화와 화해를 다루고 있다. 4중주단에서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피터가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더 이상 음악을 계속할 수 없게 되는 사건으로부터 영화는 발단을 맞이한다. 25년간 드러나지 않고 수면 아래에 잠재해 있던 단원들의 소망과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화롭고 아름답게만 비추어졌던 그들의 삶은 사실은 혼란스러운 감정의 엇갈림과 개인적인 인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그 모든 사실들을 이미 알고 있지만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가치를 이루기 위해 묻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피터의 공백으로 더 이상 그들이 지향했던 그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가치가 손상되자 그들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향해 흩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 속 파국은 한국형 막장 드라마를 모방하려는 듯이 전개되어 관객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예술 영화를 보러 온 것이지 막장 드라마를 보러 온 게 아니야.
그들의 모든 관계는 다소 갑작스럽게 여겨지는 피터의 마지막 4중주,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 푸가를 연주하며 화해의 국면을 맞이한다. 그리고 영화는 거기에서 끝난다.
영화관을 나서며 친구는 막장 드라마의 당황스러움을 나는 마지막 순간 피터의 눈빛에서 느껴진 삶에 대한 관조를 이야기했다. 영화에서 느낀 감상은 극명하게 달랐지만 친구의 비평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푸가라는 음악 형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음악의 도입에서 제1주제가 연주된다. 제1주제의 연주가 마무리 되면, 제1주제를 모방한 음악이 연주되고 그 배면에 제1주제는 계속 이어지는 대위법이 전개된다. 모방된 주제와 제1주제는 서로 다른 선율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가며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어느 순간 두 개의 선율은 갈등의 절정에 이르는 듯 하지만 곧 마지막 순간 다시 처음의 제1주제로 돌아온다.
<마지막 4중주> 속 현악 4중주단의 이름은 '푸가'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것 역시 베토벤이 죽음을 1년 앞두고 쓴 푸가다. 베토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푸가를 썼을까. 피터는 어째서 마지막 순간 푸가를 연주하고자 했을까.
영화 속에서 로버트와 줄리엣의 딸 알렉산드라는 분노에 찬 어머니로부터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폭언을 듣는다. 비극의 모방이다. 어머니 줄리엣의 삶이 제1주제라면 알렉산드라의 삶은 제1주제의 모방이 될 것이다. 모방과 모사는 다르다. 모사는 완전히 그대로 베끼는 것이지만, 모방은 기본 골격을 참고하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행위다. 푸가는 제1주제를 모사하지 않는다. 모방하여 새로운 선율을 더한다.
삶에 새로움이 더해질 때 그 삶은 분명 한 순간 방향성을 잃고 갈팡질팡하게 될 것이다. 이질적인 요소와 거센 갈등의 소용돌이를 이겨내야 할 것이다. 그 순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1주제다. 우리가 처음 무엇을 연주하려고 했는가. <마지막 4중주>에서 피터만은 그 제1주제를 잊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한 번 삶의 푸가를 겪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4중주>는 한 현악 4중주단의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 자체가 푸가임을 전한다. 이 구조를 이해할 때 영화의 마지막 푸가 연주 장면은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베토벤이 죽음 앞두고 푸가를 쓴 것처럼, 피터는 죽음을 앞두고 푸가 연주를 제안한다. 이른 바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의 시, 한유주의 소설 제목에서 인용 - 인 것이다. 죽음의 푸가는 곧 태어남의 푸가이기도 하다. 푸가 자체가 순환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시작되고 변화를 겪고 종막에 이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종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아닐까.
영화 속에서 갈등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제1주제와 제1주제를 모방한 선율은 끝끝내 '일치'되지 않는다. 로버트는 결국 제2바이올린에 머무르고, 다니엘은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려하지 않은 채 제1바이올린으로 남아 있다. 줄리엣은 아무런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비올라라는 자기의 자리로 돌아와 있다. 피터는 첼로를 연주하며 그 세 사람의 연주를 깊게 응시한다. 제1주제와 모방 선율의 대위가 절정을 이룰 때, 피터는 연주를 멈추고 자신의 뒤를 이을 새 연주자를 소개한다. 피터의 퇴장과 함께 세 사람은 다시금 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피터와 함께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6장을 새로운 연주자와 함께 다시 연주하며 제1주제로 돌아간다.
이것이 삶이다.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어느 것 하나 명확히 해결할 수 없다. 삶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렵다. 그러나 시간은 이어지고 우리는 다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순간... 어쩌면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변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느낌으로써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로버트는 다니엘에게 자신들이 항상 똑같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고 힐난했지만,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갈망하지만 이미 자신의 삶이 변화했으며, 자신들의 음악이 달라졌음을 느꼈을 것이다. 줄리엣은 현실 속에서 언어를 통해서는 아무런 화해도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비올라를 연주하며 서로의 음악 속에 깃들어 있는 화해의 멜로디를 읽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묵묵히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피터를 통해 '양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불확실하다. 영화가 꼭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허나 그 불확실함이 곧 삶이며 음악이 아니겠는가.
내게 친구의 비평이 거슬리지 않았던 것은 우리에게 제1주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함께 연주해온 제1주제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선율을 듣게 되더라도 그것이 잠시이며, 곧 제1주제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다시 돌아온 제1주제는 좀 더 한 걸음 나아간 제1주제가 되리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우리의 인생이 끝나지 않는 한 대위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우리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 끝난다 해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삶과 음악은 스스로를 변주하며 계속된다.
2013. 8.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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