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러시안 소설 (2013)

The Russian Novel 
7.7
감독
신연식
출연
강신효, 경성환, 김인수, 이재혜, 이경미
정보
미스터리, 드라마 | 한국 | 140 분 | 2013-09-19
다운로드 글쓴이 평점  




  단언컨데, <러시안 소설>은 대단한 영화다. 이런 찬사에 이골이 난 나머지 믿지 않을 사람이 더 많겠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도 없다. 영화 <러시안 소설>에 대해 알게 된 때는 홍상수 감독의 근작 <우리 선희>를 보러 시네큐브를 방문했을 때였다. 내가 소설을 쓰고 있는 탓에 역시 소설을 주제로 삼은 영화에 관심이 갔다. 부클릿 하나만을 달랑 들고 돌아왔다. 부클릿에 써있는 '클래식의 부활'이니 하는 문구들은 지나치게 식상하고 매력이 없어서 광고를 맡은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정도의 효과밖에 내지 못했다. 흥미를 끄는 것은 제목뿐이었다. 


  영화를 보러 가자고 반쯤 결심하고, 트위터에 영화를 본 분들이 있으면 어땠는지 좀 알려 달라고 글을 올려보았다. 아무도 답이 없었다. 그날 날씨가 지나치게 좋지 않았다면 아마 집을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 이 영화를 영영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날씨가 과하게 좋았고, 집에 있는 것도 따분했기 때문에 영화관을 찾았고, 텅텅 빈 객석 한 가운데 여류롭게 앉아 아무런 기대도 없이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속 소설 '조류인간'의 한 대목을 읽는 배우의 나레이션과 함께 한 때 인기있었던 게임 형식인 사운드노벨 - 효과음과 음악, 인물들의 정적인 움직임이 화면에 나타나는 가운데, 텍스트를 중심으로 읽어내려가며, 펼쳐지는 여러 상황 속에서 플레이어가 진로를 선택해나가는 게임 형식 - 에서와 같이 화면 한 켠에 텍스트가 표현되었다. 마치 커다란 아이패드로 전자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색적인 도입과 함께 오래된 필름 느낌을 준 영상이 펼쳐진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신인 배우들이 등장해, 마치 실제 현실에서 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연기를 펼쳐 나간다. 영화를 관람한다기 보다는 누군가의 인생을 훔쳐보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여러가지 복선과 함께 서로 미묘하게 겹치고 틀어지도록 배치된 세 편의 소설 속 이야기가 교차된다.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한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과 다른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이 동일 인물인지, 단지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인지조차 모호하다. 이선균과 서우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파주>에서 '파주'가 안개 속에 덮인 이공간처럼 묘사되듯이 <러시안 소설> 속의 파주도 묘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남주인공 격인 신효와 그가 사랑한 천재 신인 소설가 경미가 만나는 '우연제'라는 공간 역시 천년의 물약이 숨겨져 있는 대나무 숲을 지나 자리하고 있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영화는 익숙함과 낯설음,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이에서 놀랍도록 탁월한 균형을 유지하며 긴장감을 지켜낸다. 능숙한 것도 같고, 미숙한 것 같기도 한 신인 배우들의 연기조차 이 영화에서는 계산된 장치로 여겨진다. 대체 이 사람들이 연기를 하는 것인지, 그냥 그런 사람을 데려다 쓴 것인지 모호해지는 것이다. 아, 뭘까,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하는 사이에 영화는 빠르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관객은 속수무책으로 영화 속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가고 만다.  


* 여기서부터는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러시안 소설>의 진가는 관객을 영화로 빨아들인 이후 펼쳐진다. 관객이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려는 순간, 1부를 끝내버리고 스탭롤 같은 자막이 나오며 2부를 시작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에서 안노 히데야키 감독이 애니메이션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카메라를 관객석으로 돌려버리는 장면에 비견된다. <러시안 소설>의 2부는 태연하게 '영화처럼' 전개된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오던 영화의 전개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1부와는 반대로 '이건 정말 영화입니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아, 이렇게 되면 보는 사람의 머릿 속은 한 번 더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1부와 2부... 대체 어느 쪽이 '영화'인가. 어느 쪽이 가상이고, 어느 쪽이 진실인가. 멍해진다.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렸다고 생각한 1부는 사실은 주인공이 2부의 시점에서 소개한 자신의 소설 속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마치 주인공 자신처럼 2부의 이야기를 멍한 상태로 따라가고 있다 보면 어느 사이 영화는 끝나 있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석에 불이 켜진 후에도 나는 아... 벌려진 입을 쉽게 다물지 못했다. 영화관을 나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중에도 혼자 마음 속으로 "이건 진짜다. 이건 정말 대단한 영화다." 라고 되뇌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압도되는 느낌의 영화를 본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낚시터에서 낚시꾼이 밤새 낚시를 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낚시꾼은 밤새 낚시를 한 물고기를 잡았다 풀어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밤새 낚시꾼을 바라보던 또 다른 낚시꾼은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낚시꾼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낚시꾼은 또 다른 낚시꾼에게 대답했다. 
"어제 잡다 놓친 그 놈을 찾느라 이 고생이라고"


영화의 첫 화면을 수놓은 이 텍스트를 읽는 여주인공 재해의 목소리가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늪에 앉은 낚시꾼 곁으로 다가가는 한 청년의 모습과 그 광경을 읽는 여인의 목소리는 커다란 바위가 되어 심연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아 깊은 파문을 일으킨다. 다시 한 번 더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참으로 대단한 영화였다. 첫 관람의 충격을 잃고 싶지 않아 다시 보기조차 아깝다. 신연식 감독에게 찬사와 감사를 보낸다. 




2013. 10. 24. 멀고느린구름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