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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리뷰

비포 미드나잇, 인 파리

멀고느린구름 2013. 7. 9. 04:12



비포 미드나잇 (2013)

Before Midnight 
7.7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샤무스 데이비-핏츠패트릭, 아리안느 라베드, 아티나 레이첼 챙가리
정보
로맨스/멜로 | 미국 | 108 분 | 201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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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파리 (2012)

Midnight in Paris 
7.9
감독
우디 앨런
출연
오웬 윌슨, 마리옹 꼬띠아르, 레이첼 맥아담스, 애드리언 브로디, 카를라 브루니
정보
코미디, 판타지, 로맨스/멜로 | 미국, 스페인 | 94 분 | 2012-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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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보면 자정이란 시각에 깨어 있어 본 적이 그리 많지 않다. 항상 글을 쓰며 살아왔지만 나는 새벽형 인간이거나 아침형 인간에 가까워서, 착실하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해온 것이다. 11시 즈음이면 항상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곯아떨어져 버려서 12시 즈음에 깨어 있는 나를 보기란 좀처럼 어렵다. 


  근래에 자정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영화 두 편을 보았다. <비포 미드나잇>과 <미드나잇 인 파리>다. 한 편은 상상마당에서, 또 한 편은 시네큐브에서 보았다. 서로 전혀 다른 영화이지만 자정이라는 연결고리 덕분에 미묘하게 연결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생각해보면 '자정'은 참 묘한 시간이다. 그 시각은 모든 시간들의 종착역인 동시에 출고지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까지 달려오신 분은 다시 반대로 달려가세요 라고 쓰여 있는 반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매일매일은 12시를 만나고 떠나는 일과 같다.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의 시간을 거쳐 미드나잇에 이른 <비포 미드나잇>의 자정이 시간의 종착역에 가깝다면, <미드나잇 인 파리>의 자정은 과거에 대한 향수로부터 탈출해 나와 새로이 시작하려는 출고지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를 자세히 보았다면 거꾸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제시와 셀린느의 로맨스(선라이즈)와 운명적 해후(선셋)는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부부싸움(미드나잇)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세심한 관찰자라면 그 둘이 처음 만난 날부터 일관되게 논쟁을 벌여온 지적인 부부라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의 결혼생활이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으리라는 것 역시. 모든 운명적 만남과 사랑은 결국 남루한 현실 속에 포섭되고 말 것이다. 사랑이 극적이면 극적일 수록 그 찬란한 불꽃은 한 순간 빛나고 말 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그 허망한 불꽃을 찾아 거리를, 혹은 인터넷상을 유랑한다. 어째서일까. 아마도 모든 사람의 관계가 결국은 비포 미드나잇의 세계로 흘러들어감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단 한 순간의 찬란한 불꽃이라도 보았으면. 단 한 번 바라본 그 불꽃의 아름다움에 의지해 비포 미드나잇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미드나잇 인 파리>의 소설가 길과 약혼녀 이네즈의 사이에는 어쩌면 그런 찬란한 불꽃의 순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길은 1920년대의 파리에서 그 불꽃을 찾으려 한다. 현실적인 성격의 이네즈에게는 길이 찾으려 하는 그 불꽃의 소중함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현실 속에서 불꽃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순간, 과거나 미래 혹은 다른 우주 속에서 그것을 찾으려 도피하게 된다. 무릉도원과 유토피아, 엘도라도의 세계를 찾아 무모한 닻을 올린다. 우리는 언젠가는 안개에 덮인 숲 속을 지나 황금의 도시를 만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찾던 것이 '그저' 황금에 지나지 않았는가? 라는 허무한 물음에 직면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쓸쓸하게 키를 돌려야 할 것이다. 자정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우리는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포 미드나잇>과 <미드나잇 인 파리>, 그리스와 파리라는 두 낭만적 공간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자정을 지나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아침은 그 이전의 날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아침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새로운 아침이 되지는 않으리라. 아마도 그 아침은 그 이전의 이전, 혹은 언젠가 과거에, 혹은 언젠가 미래에 겪었을, 겪게될 아침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떠하리. 우리의 삶이 따분하게 반복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다만, 함께 하는 당신과 내가 단 한 번 찬란한 불꽃을 바라본 적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그 이상 욕심을 낸다면 우리는 엘도라도를 발견한 뒤에도 다시 또 다른 엘도라도를 찾아 나서는 어리석은 탐험가와 같아질 것이다. 


  자정은 이미 한참 지나간 새벽.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언젠가 먼 과거의 당신, 혹은 미래의 당신과 바라보았던 크고 영롱한 불꽃에 취해본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사랑을 했었노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는 것이다. 




2013. 7. 8. 새벽.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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