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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리뷰

신경숙 - 외딴방

멀고느린구름 2013. 4. 30. 07:08
외딴방 - 8점
신경숙 지음/문학동네




"누가 심었을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배추는 자란다. 자라기만 할뿐 속은 차지 않는다. 푸른 배춧잎에 공장의 검은 먼지가 쌓여 있다." -244p-

 

 

  나는 매니악한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노희경씨의 작품은 잘 보지를 않는다. 얼마 전에 아버지댁에 놀러갔다가 아버지가 커피프린스 1호점을 즐겨보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어보니, 아버지 역시 삶 자체가 힘겨운데 너무 힘겨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드라마를 보는 건 괴롭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냥 걱정없이 돈도 펑펑 쓰고 화면 예쁘고 배우들 예쁜 드라마를 보는 게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내가 윤석호류의 드라마를 좋아하나보다.

 

  사실, 노희경씨가 그리는 밑바닥 인생의 이야기들은 직접 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나 그 삶을 겪어온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괴롭다. 노희경의 이야기는 애써 묻어두었던 상처를 선명하게 재현 시킨다. 어지러운 욕설들, 남루한 거리, 지친 사람들, 그러면서도 끝까지 어떤 끈을 놓치 않으려 아둥바둥거리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할퀴는 나날. 강자가 약자를 누르고 약자도 약자를 공격하는 공간. 그곳이 달동네라는 공간이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집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 단 한 번도 방 두 칸 이상에 욕실과 화장실이 붙어있는 전세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있다. 그 사람들 속에 나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이 있다.

 

  노희경씨의 작품류로만 그런 세상을 접한 중산층의 다정한 이들은 감동을 받고 최대한 따스한 시선으로 가난을 바라보려 한다. 그러나 그 다정다감한 시선이 어떤 시혜의 빛깔을 띠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볼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에게 내 가난의 상처를 온전히 다 드러내었다가 결국은 그 상처를 모두 부정당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살아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상처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 나는 되도록 관계에서 내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어렵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 애쓴다. 

 

  언제나 자기 속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신경숙씨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구로공단 어딘가의 음습한 외딴방의 기억. 아직도 거기에 갇혀 있는 희재언니의 그림자. '그래도 그녀의 물 속 같은 목소리... 가끔은 깔깔 웃으면서 그럼, 그럼, 했던 그 오후 다섯시 같은 목소리, 그 손뼉 치는 소리는 선명(185p)'하게 작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 역시 작가처럼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어느 부분, 어느 공간 주위를 머뭇머뭇 맴돌았다. 그녀가 영등포여고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나는 장평중학교와 다대고등학교의 문을 열었고, 그녀가 구로공단으로 걸어갈 때 나는 조간 신문배달 가게의 문을 열었고, 그녀가 윤순임 언니의 작업복에서 돈을 꺼낼 때 나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갖고 싶었던 캬라멜을 슬쩍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고, 동네 서점에서 책 사이에 꽂혀 있는 별책부록을 재빨리 가방에 집어 넣었다. 그녀가 17~18살에 시장을 보러 갈 때 똑같은 나이의 나도 재래시장을 돌며 오뎅이니 김치니 하는 것들을 샀다. 친구들이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것을 보며 부러워했고, 그것을 하나 사먹기 위해 차비를 아껴 산 두 고개를 넘어 통학을 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바보취급까지 당해야했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맞아야 했다. 그 증오와 울분을 증오와 울분이 아닌 용서와 이해로 바꾸어보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해야 했을지 제 3자는 온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몸의 기억력은 마음의 기억보다 온화하고 차갑고 세밀하고 질기다. 마음보다 정직해서겠지." -252p-

 

  조그만 캬라멜통을 손에 쥐던 감촉, 조그만 책을 재빨리 가방에 넣을 때 느껴지던 바람결, 내 종아리를 후려갈기던 각목의 뜨거움, 쏟아지던 욕설들, 학교에서 집까지의 아득한 거리감, 비명 소리들. 그 모든 것이 아직 생생하다. 살아오면서 어떤 식으로든 보호받고,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해지고, 존중 받고, 사랑 받았던 이들은 그닥 경험해보지 못했을 일들이 내 머릿 속에는 가득하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그 못든 것을 또렷한 영상으로 드러내버린다. 그래서 싫다.

 

  외딴방은 천천히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굳게 잠긴 외딴방의 자물쇠를 연다. 그리고 조심스레 문을 미는 것이다. 오래되어 끼이이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길게 들려온다. 상처의 냄새는 진하고 아리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상처를 그리 계속 썩게 놔둘 수 있을 것인가. 다음 세상으로 건너갈 때 우리는 그 많은 썩은 상처의 상자를 짊어지고 과연 요단강을 건널 수나 있을까. 끝내 열어보지 못한 상처의 상자를 짊어지고 죽은 이들은 결국 강을 못 건너고 이승에 남아 원혼이 되는 건 아닐런지. 영혼들의 세상으로 평온하게 떠나기 위해서는 결국 살아있는 동안 그 상자를 열어야 한다. 그리고 썩어버린 상처를 씻고 보듬어서 치유해야 한다. 그 작업은 빠르면 빠를 수록 좋으리라.

 

  신경숙은 어렵게 그 하나의 상자를 열었다. 작가란 자신이 가진 상처의 상자를 모두에게 열어보이는 이다. 그리하여 다른 이에게도 자신의 상자를 열 용기를 주는 이다. 이것 보아요. 이리 나약하고 용기 없는 나도 힘겹지만 이렇게 열어보았어요. 당신의 상자는 어떤가요?

 

  외딴방을 읽은 후 반쯤 열었다가 굳게 닿았던 상자를 조심스레 다시 열어본다. 아름답던 기억으로 덮어두었던 숨은 그림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쓸쓸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향해 미소지어본다. 가을 같은 손을 내밀어 본다. 외딴방 속에 나왔던 에리노어 루즈벨트의 말을 떠올려 본다.

 

"아무도 너의 허락없이는 네게 열등감이 들게 만들 수 없다"

 

 

 

2007. 9.1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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