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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남은 대답했다.
“첫눈에 반해서요.”
그녀의 질문을 숫제 그쪽은 왜 저를 좋아하세요? 라고 받아들인 것만 같은 답이었다.
“와.. 좋네요. 그 대답. 기억해둘게요. 그쪽의 사랑이 어디에까지 이르는지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골목길을 따라 사라졌다. 가벼운 걸음이었다. 어쩐지 고백을 해버린 것 같아 뒤를 따라가기도 어색해 그남은 자리에 머물렀다.
다음날 학교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그남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지난 날 하나의 질문으로 그남의 모든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그남은 싫지 않았다. 공강 시간마다 그녀와 그남은 중앙 운동장 비탈에 있는 잔디밭에서 만나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과 동경하는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하늘은 티없이 맑았다. 갓 세수한 얼굴이었다. 바람은 따스한 포옹처럼 불어왔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완벽했다.
학교에서 일주일에 꼭 3일, 그남과 그녀는 수업시간과 공강시간이 같았다. 단짝처럼 붙어다니게 되었다. 전공에 대한 이야기는 바닥이 났지만, 두 사람은 계속해서 다른 주제로 넘어가 말을 이었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 정치에 대한 이야기, 사회문제,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들. 그남 쪽에서 시작한 이야기에 그녀는 적절하게 답했고, 그녀 쪽에서 시작한 이야기에 그남은 깊은 흥미를 느꼈다. 봄은 향기롭게 익어갔다. 4주가 지났다. 두 사람 사이는 틀어지지 않았다. 그남은 완벽한 세계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했고, 방심한 나머지 문을 걸어잠그는 것을 잊었다.
그 결과 그남과 그녀가 알게 된지 5주째 되던 날 그남은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상대는 첫날의 선배였다. 그남은 그녀 곁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자연히 멀어졌다. 그녀의 옆자리는 그남 대신 수강신청을 정정한 선배의 차지가 되었다. 완벽한 것만 같았던 세계는 더 이상 그남의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그남은 1년을 망설인 끝에야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마음을 전했다. 첫눈에 반해서요. 이번에는 소설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남에게 절교를 통보하고 잠적했다. 둘은 이제 한 달에 한 번도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 다음의 만남, 또 다음 번의 만남. 이후 그렇게 다섯 번을 더 그남과 그녀는 만났다. 그러는 사이 11년의 세월이 지나가 버렸다. 그남은 언제나 스무살 적의 그날을 그녀와의 처음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남이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15살 무렵의 어느 하루가 마음에 걸렸다. 그남은 이미 그 하루를 잊었는지 모르겠으나 내 가슴에는 짙게 남아 있었다. 그때 나와 그남은 중학교 2학년으로 같은 반에 소속이 되어 처음으로 만났었다. 우리의 우정이 한창 무르익었을 즈음 소년은 들뜬 표정으로 한 소녀를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나는 그 소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소녀라고 지금껏 마음에 간직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2012. 7. 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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