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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물어도 되나...?”
노옹이 폭포수 소리에 묻힐듯 말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파는 가까스로 말 뜻을 알아챘다.
“뭘?”
“아까 네가 물어본 거. 여기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노파는 말끝을 흐렸다. 노옹은 노파의 사정을 짐짓 짐작하고 있었지만 선뜻 물어보긴 곤란한 눈치였다. 한동안 말성이던 노옹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다시 말을 시작했다.
“얘기 들었어... 사별했다며..”
“사별은 무슨... 이 나이 즈음이면 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
그러고는 노파는 얼마간 생각에 잠기어 있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떼며
“자연이란 평온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저 고요가 무섭기도 한 거야 그렇지...?”
하고 계곡의 신령에게 묻기라도 하듯이 넋을 잃고 폭포수 쪽을 응시했다. 노옹도 역시 폭포수를 응시하며 답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고요한 척하는 것뿐야. 실은, 늘 시끄럽고 혼란스럽지. 어쩌면 죽음도 존재의 한 요소일지 몰라... 끝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또 한 세계로 섞여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는 과정일지도 몰라...”
“그래도 작가라고.. 어려운 말을 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야 아마, 분명..”
노파는 시선을 거두어 노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식 웃어버렸다. 어떤 위선도 가미되지 않은 깨끗한 웃음이었다. 노옹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노파는 거칠게 쏟아지는 폭포수와 잔잔히 흘러가는 하류의 냇물과 그 속에 사는 물고기들을 동시에 생각했다. 어떤 것도 보이는 것과 같지 않아. 라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지난날의 노옹도 그랬을까. 보이는 그와 보이지 않는 그 사이에는 전혀 다른 무엇이 있지는 않았을까. 몇 번이고 번민한 문제였지만 노파에게는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 노옹의 세계로 뛰어들 여력이 없었다. 언제나 그의 세계는 지나치게 무성한 나무들이 자라 있어 컴컴하고 선명한 길도 보이지 않는 원시림 같게 느껴졌다. 원시림 속에 들어서는 순간 노파는 한 없이 작아지고 길도 잃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러나 역시 온전히 그 세계에 발을 내딛어 본 적은 없었다. 길을 잃어도 좋으니 끝까지 가보자고 마음 먹은 적은 많았으나 실제로 가본 일은 없었다. 그때 노옹이 물었다.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아직 사람들이 밟지 않은 낙엽이 깔린 길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 흔적이 남은 길이야. 어느 쪽이었습니까? 할머님의 인생은?”
로버트 프로스트. 가보지 않은 길. 노파는 대답이 없었다. ‘할머님’이라는 말에 마음이 걸린 탓도 있었다. 노옹이 예전부터 무신경한 농담을 종종하곤 했지 라고도 생각했다. 자신에게 예민한 만큼 상대에게 예민할 수는 없었던 사람이었다. 노파가 노옹에게 바란 것은 형이상학적인 설명이나 재밌는 농담이 아니었다.
“아.. 미안. 할머님은 취소.”
노파는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온전히 자연스러운 웃음은 아니었다. 긍정과 부정이 반쯤씩 뒤섞인 모호한 피식이었다. 노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쩔줄을 몰라하며 말을 꺼내려 하다 다시 집어 삼키는 마음의 움직임이 노파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여전히 더디고 어리숙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노파는 자신 역시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만큼 세상도 변하지 않았다. 태초에 주어진 원리에 의거해 높은 곳에서 물이 내려오고 폭포가 되고 급류가 되었다가 평온해진다. 바다는 물들의 무덤이다. 동시에 부활의 성전이다.
“그만.. 가자.”
노파는 꼬리를 무는 상념을 끊어내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노옹은 어린애처럼 노파의 뒤를 따랐다. 울창한 숲 속을 말없이 계속 걸었다. 둘은 일정 거리를 두고 그 이상 가까워지지 않은 채 길 위에 나란한 평행선을 그렸다. 해가 서쪽으로 45도 각도 정도로 기울었을 즈음 올레길 9코스의 끝에 다다랐다.
“만나서 반가웠어...”
노파가 먼저 작별인사를 했다.
“응.”
노옹은 아쉬워했다.
“그럼, 잘가.”
노파가 등을 돌리고 먼저 길을 재촉했다. 노옹은 노파의 등을 바라보며 언제나의 그 뒷모습이라고 여겼다.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싶었다. 노옹은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는 양 외쳤다.
“그때, 와줘서.. 정말 고마웠어!”
노파는 대답하지 않은 채 가던 길을 걸어갔다. 노옹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것이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고.
2012. 5. 1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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