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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2

멀고느린구름 2012. 5. 13. 07:50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라고 말을 건내며 노파는 한 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긴다. 노옹은 자신 앞에서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으로 두 눈을 세차게 비빈다. 현기증도 인다. 아직 정신은 흐려지지 않았다. 노옹은 다시 눈 앞에 선 노파의 얼굴을 확인한다. 주름 골이 깊이 파여 세월의 흔적이 선연하지만 여전히 오래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반달 같은 이마, 바람이 스친 자국처럼 가느다란 눈썹, 깊은 우물을 닮은 눈, 고운 곡선을 그리는 코, 동화 속 소녀마냥 옅고 얇은 입술. 이런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노옹은 생각한다. 노파는 노옹이 앉아 있던 벤치에 내려앉았다. 노옹은 일어선 채다. 


“뭐해? 앉아요. 헛것 보는 거 아냐.”


노파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말하자, 노옹은 그제야 안심이 되어 옆 자리에 조심히 앉는다. 


“진짜? 맞습니까... 정말입니까?”


노옹은 확답을 받으려는 듯이 재차 묻는다. 노파는 대답 대신 살풋 미소를 띠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노옹은 그제야 마음을 놓는다. 그리고 감사했다. 무엇에게든. 자신이 오늘 제 정신으로 돌아와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노옹과 노파는 함께 자신들이 걸어온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을 오래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초여름의 부신 햇살과 간간한 실바람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 노옹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진실로 오늘이 자기 생의 마지막 순간이었다면 좋겠다고. 노파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어째서 여기에 이렇게 나란히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겠지?”


노옹이 답했다. 


“중요하지 않잖아. 그렇지? 그냥 그렇게 된 거야. 여러가지 일이 있었겠지 물론.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 일들이.”

“그렇지...”


노파도 노옹처럼 먼 과거의 시간 속으로 여행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포플러나무 아래 핀 마가렛 꽃을 내려다본다. 노옹이 가만히 말을 내려놓는다.


“마가렛..”


노파가 피식 웃는다.


“어떻게 알았어?”

“뭐가?”

“궁금한지.”

“그냥.”

“늙어도 여전하구나.”


그리고 노파는 무언가 떠오른 듯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오랜만에 퀴즈. 마가렛의 꽃말은?”

“음... 아.. 진실한 사랑.”


노옹은 어쩐지 자신의 목에 힘을 주어 말했음을 느낀다. 노파와 노옹은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노옹이 말을 잇는다.


“생각나나? 10년 전이었나. 우리 만난 적이 있지. 어디였더라...”

“제주도 안덕계곡.”


노파가 망설임없이 답했다.




2012. 5. 1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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