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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3

멀고느린구름 2012. 5. 18.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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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기정은 제주 올레길 9코스의 시작점이었다. 박수는 제주도 사투리로 물을 마시는 바가지이고, 기정은 절벽이라 했다. 병풍처럼 펼쳐진 기다란 바위절벽 위에 샘이 있어서 그리 이름지었다고 들었다. 올레길 코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짧은 코스라고 해서 선택했지만 처음부터 오르막이었다. 노파는 다소 후회하면서도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좁다란 숲 길을 지나 박수기정 정상 부근에 다다르니 넓다란 길이 나왔다. 관광객들을 위해 닦아놓은 길이었다. 노파의 이마에는 벌써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숨도 가빠왔다. 노파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자기의 주름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이제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았다. 


벤치에 앉아 구름 한 점 없는 여름하늘을 올려다 보며 상념에 빠졌다. 지나는 사람들 중 몇몇이 할머니 혼자 여기까지 오셨나며 힘내라는 말을 건냈다. 반가우면서도 언짢은 기분. 아직도 노파는 자신의 가슴 속에 싱싱한 심장이 뛰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그런 마음은 더했다.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면 아쉬운 것들 투성이었다. 좀 더 용감했어야 할 순간들, 혹은 한 발 뒤로 물러나야 했거나, 에둘러 가도 좋았을 때가 있었다. 사람은 어째서 이런 실수투성이인 인생을 살아가고, 그것들을 깨닫고 후회할 순간에 힘을 잃고 스러져가는가. 노파는 상념을 떨치려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수리 위로 내리쬐는 한낮의 쨍한 햇볕이 흡사 목탁소리처럼 명징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화력발전소를 지나 제주도의 비경 중 하나인 안덕계곡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다다랐다. 울창한 원시림이 눈 앞에 기다리고 섰다. 노파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때였다.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저기... 실례합니다만 혹시...”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노파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그였다. 


“역시 맞군요... 잘 지냈어?”


노옹은 얼마 전에라도 만났던 사람처럼 살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노파는 어째서 이런 곳에서까지 노옹을 만나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심정이었다. 노파와 노옹은 간단한 인사치레를 나눴다. 굳이 따로 길을 걸어가는 것도 어색해 함께 안덕계곡을 오르기로 했다. 


“우리가 만난 게 얼마만이지?”


말없이 땅만 보고 걷던 중 노옹이 불쑥 물었다. 


“글쎄... 한 8년쯤 된 것 같은데...” 

 

노파는 마치 계속 헤아리고 있었던 사람마냥 쉽게 답했다. 그리고 둘은 다시 말이 없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이번에는 노파가 말을 붙였다. 


“다음 소설 무대가 제주도라서. 제주도 4월 혁명의 상처를 물려받은 주인공이 도시에 나가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올레길을 걸으며 상처를 치유한다는 그런 내용이지. 재밌으려나...?”


노옹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올레길에서 만난 젊은 여자와 노년의 로맨스를 겪는 그런 내용은 아니고?”


노파는 새침하게 말했다. 그런 점은 이전과 다름없다고 노옹은 생각했다.


“어떻게 알았지?”

“네가 쓰는 게 대부분 그런 내용 아니야. 좀 바꿔봐 이제.”

“그럴까. 젊은 여자가 아니라 노년의 여인으로?”


노파는 할 말 없다는 표정으로 노옹을 한 번 흘겨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노옹도 주눅이 들어 한 동안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어가니 폭포수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안덕계곡이었다. 


“아, 안덕계곡이다.”


노파가 말했다. 노옹은 말 안하기 시합해서 이기기라도 한 양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어서 가보자.”


노옹이 먼저 앞섰다. 노파는 앞서가는 노옹의 뒷모습에서 오래전 청년 시절의 그를 떠올렸다. 그러자 덩달아 자신도 청년시절의 자기로 돌아간 것만 같이 느껴졌다. 가슴 속에서부터 싱싱한 힘이 솟는 것만 같았다. 노옹의 뒤를 좇았다. 곧 눈 앞에 시원하게 쏟아져내리는 물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노파와 노옹은 나란히 서서 여름의 열기를 뚫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빠르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며 세월이 그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고 여겼다. 한편, 노옹은 채 가시지 않은 청춘의 열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체념과 회한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이였다. 



2012. 5. 1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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