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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오늘도 무사히

멀고느린구름 2022. 9. 30. 09:44

그남이 갑자기 총을 꺼내들었을 때, 별일이 다 있군 싶었다.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와, 아차 했으나 그남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조금 언짢은 표정만 지어보였다. 나는 자 이제 어쩌라는 거죠 라는 심정이 되어 그남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남 자신도 딱히 준비해둔 원고가 없는지, 총을 든 채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별 수 없어서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뭘 원하죠? 돈, 아니면 저한테 무슨 원한이 있나요?” 

 

그남은 긴장한 듯 더듬더듬 응답했다.

 

“이...일단 신고, 신고는 하지 마요. 아니,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냐고?” 

 

그남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카운터에는 전화기가 없었고, 내 휴대폰은 그남 뒤편의 콘센트에 충전을 위해 꽂아둔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알리자 그남은 조금 긴장이 풀리는 모양이었는지, 한껏 곧추세웠던 어깨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진짜 총이야..요. 허튼, 허튼 짓하면 쏘니까, 입 먹고 있어!” 

 

곤란했다. 아무리 그래도 입을 먹으라는 요구를 들어주느니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은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남이 가게에 들어온 것은 10분 전이었다. 청바지에 청자켓을 입고 있어 그저 흔한 20대 빈티지매니아려니 했을 뿐이었다. 내 가게는 4인 이상 손님이 들어오면 옴짝 달짝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가게로 동네 시장 구석에서 잔치국수와 독립서적을 팔고 있었다. 나는 손님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관상을 보고 국수 손님인지, 책 손님인지 예언하는 놀이를 즐기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는데, 그남은 누가 뭐래도 국수 손님이었다. 하지만 그남은 예상을 깨고 서가에 꽂힌 책들을 한 권씩 뽑아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의외로군 싶었지만, 느닷없이 내게 총을 겨눌 정도로 의외일 줄이야.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남은 총을 겨누고 있을 뿐,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손님이라도 오면 어쩌려고...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럴 일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평균 방문 손님이 5명 안팎인데, 그남은 여섯 번째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까지 계산한 건가. 의욕 없는 얼굴과 달리 상당히 주도면밀한 남자였다. 그남이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모처럼 조성된 긴장감은 자위를 마친 다음과 같이 빠르게 식어버렸고, 나는 다시 모든 게 지겨워졌다. 그냥 총을 쏴주면 안 될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거기 앉으세요. 계속 서 있기 힘드실 텐데.” 

 

나는 뭐라도 좀 해보라는 심정으로 그남을 자극했던 것인데, 그남은 너무 순순히 테이블에서 의자를 빼 앉는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갖다줄 뻔했다. 

 

“국수 드실래요?”

“밀가루는 안 먹습니다.” 

 

그남의 재빠른 손절에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시간은 따분하게 서성거렸다. 지난 3개월 동안 서랍에 모아둔 수면제를 이참에 다 털어넣을까. 그러면 그남이 자살을 강요한 것처럼 몰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때 민폐까지 끼치는 건 아니다 싶었다. 그남은 어떻게 보아도 20대 초반이었다. 코로나19 탓에 검은 면 마스크를 쓰고 있기는 해도, 주름 한 줄 없는 눈가와 깨끗한 이마, 아직 탁해지지 않은 눈빛은 그의 젊음을 가리지 못했다. 스물, 스물하나 즈음의 나는 종종 동대문 상가 일대를 쏘다니곤 했다. 3평 정도 크기의 구멍가게 앉아 하루 온종일을 보내는 사람들의 무료한 표정을 바라보며, 저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하고 오만한 의문을 품곤 했었다. 내 가게는 3평은 아니고, 5평 정도는 되지만 이따금 상상한다. 지금의 20대 청년들이 내 가게 앞을 지나며, 나를 바라보며, 내 무료한 표정을 보며 바로 그때의 내가 되겠구나. 문득, 눈앞의 남자가 경이롭게 느껴졌다. 청년 시절의 나는 어째서 과감하게 구멍가게로 뛰어들어가 총을 겨눌 생각을 못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아까는 반농담으로 했던 말이지만 이제 진심으로 국수 한 사발을 대접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남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그대로 뒤돌아서 가게를 나가버렸다. 나는 한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싶어 멍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뛰어나가 시장의 입구와 출구 쪽을 번갈아 살폈지만 그남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시장 골목을 가린 하늘의 천막들 사이로 하현달이 보였다. 나는 터덜터덜 가게로 돌아와 일일 매출장부를 정리하고, 소등한 뒤, 유리문을 밀고 가게를 나왔다. 유리문 안 쪽의 작고 캄캄한 나의 세계는 오늘도 무사했다. 이런, 

 

 

2021. 4. 2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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