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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는 전화
먼 옛날의 일이다
지은 지 백년이 되어간다던 건물의
나선형 돌층계를 오르고 있을 때
내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안개 뒤로 숨기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무음의 소리가
지나온 1층과 머지 않은 3층 사이를
비어있던 시공의 기둥 속을 흔들어
질문들을 뒤섞어 놓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먼 옛날의 일이었다
그날 여러 겹의 벽을 지나온
침묵의 당신은 누구였는가
나를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게 되었거나
사랑하게 될 당신
끝내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한
먼 옛날의 우주여
반복되는 계절이여
웅크려앉은 고독이여
왜 어떤 기억은 사라지고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가
사람은 모두 선택된 옛날 속에 갇힌다
같은 날을 살며 다른 날이라 믿는다
나선형 계단의 2층 즈음에 서서
말 없는 전화를 받는다
어디로 가려했는지 기억을 잃고
첫 입맞춤의 장면을 떠올리지 못한다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처럼 태연히
다음 하루를 또 살아갈 것이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제발 이름을 불러주세요
2019. 7. 3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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