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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
파묵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쓴 소설 창작론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파묵의 본서 <소설과 소설가>가 하버드대학교에서 그가 한 특강의 강연록인 점, 창작론의 내용이 일정한 보편성의 범주에 포함되는 점 등을 든다면 다소 작가 개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한 마디 쯤 거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의 하버드 마케팅은 비단 <정의란 무엇인가> 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던 책 판매 전략 중 하나다. 오르한 파묵의 이번 강연록이 번역되어 나온 맥락도 그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일종의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1등 대학의 이미지, 천재들만 가는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인상이 있다. 따라서 그 아카데미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교육 역시 최고, 최상의 것일 거라는 기대를 품기 마련이다. 책의 판매부수 또한 그 기대효과의 연장선상에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토록 많은 판매량을 올렸음에도 그에 대한 담론이 풍부하게 형성되지 않은 점 - 굉장히 논쟁적인 책임에도 - 은 역시 구매는 했으나 읽지는 않았다라는 가설을 세울 수밖게 없게 만든다. 그저 책을 들고 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유식한 사람, 학식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자아내는 패션 소품으로서의 역할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파묵의 경우 역시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는 점, 그리고 하버드대학교에서 강연을 했다는 것. 두 가지 사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나 역시 그 점에 현혹된 독자 중 한 명이다.
서점에서 책을 펼쳐들게 되는 제 1 원인은 나의 경우 이미지다. 책의 표지와 제목이 감각적인 것에 1차적으로 끌리게 되고, 이후 날개를 펼쳐 작가의 프로필을 확인한 후, 아무 페이지나 펼쳐 문장을 읽는다. 이 3단계의 관문을 통과한 후 좀 더 다른 책을 들춰보다가도 끝까지 머릿 속에 문장의 잔상이 남아 있으면 그 책은 나의 선택을 받게 된다는 식이다.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선택되었다.
연 이은 공모전 낙방으로 자체적인 진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요즘 많아졌었다. 그러던 차에 <소설과 소설가>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파묵이 전하는 창작론의 메시지에 귀를 쫑긋 기울이게 되었다. 파묵은 책에서 작가를 실러의 견해에 따라 소박한 작가와 성찰적인 작가로 이원화 시킨다. 소박한 작가란 대략 작가적인 본성에 따라 혹은 어떤 내면적 힘의 이끌림에 따라 자기 속에서 떠오르는 그대로를 따라가며 하나의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작가 유형이다. 성찰적인 작가란 문체의 효과, 서술시점, 이야기의 주제, 플롯, 서술기법 등을 다각도에서 고민하고 가장 효율적인 배합을 찾아내어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꽉 짜여진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작가 유형이다. 무위와 인위의 차이라고 해도 좋겠다. 파묵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 두 극단적 작가 유형의 스팩트럼 사이 어딘가 즈음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소박한 작가에서 성찰적인 작가로 변화해왔다고 회고하고 있다.
파묵의 이러한 분류는 분명 매력적인 분류 형태이긴 하지만 사실상 실러의 견해를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고, 다소 방만한 작가 유형론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작가들은 두 부류의 한 측면에 서 있지 않고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작품을 쓰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자신의 체험이 강하게 묻어나는 회고적인 작품을 쓸때는 소박한 작가 쪽에 기울다가도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욕구가 승할 때는 성찰적인 작가 쪽에 기울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작가 자신의 전략에 따라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분류는 사실 분류라고 하기 보다 창작 방법론의 두 측면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에서 더욱 천착해 들어가는 주제는 '소설의 중심부'론이다. 소설에는 우리가 표면적으로 감각하지 못하는 중심부가 있고, 작가도 독자도 그 중심부를 향해 떠나는 모험이 바로 창작이자 독서라고 하는 것이 그의 표현이다. 굉장히 객관적이면서도 낭만적인 표현법이다. 파묵은 책 대부분을 이 소설의 중심부에 대한 낭만적 언설에 할애한다. 소설의 중심부를 찾아나서는 작가와 독자의 여정은 마치 잃어버린 고대문명을 찾아나서는 고고학자의 모습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말을 붙여도 소설의 중심부가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효과적으로 감추고, 혹은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을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사실상 이 책은 소설 창작론으로서는 실패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의 창작론서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측면이 있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서는 정확한 성공의 요소들을 짚어내고 그것을 전수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파묵은 아무것도 전수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공감하는 부분들을 이끌어내고, '이런 것이 있는 거 다 알지? 나도 알고 있어. 우리들만의 비밀이지.' 라고 문학 커뮤니티를 만들어내는 일에 더 방점을 둔다. 소설의 중심부가 있고, 작가들이 그 중심부를 구축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에피소드 소개를 듣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아무도 작가가 될 수 없다. 그저 라디오 방송 토크쇼에 나온 작가의 내밀한 고백을 듣는 쾌감을 느끼는 수준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실패한 창작론서야말로 작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스티븐 킹은 아주 자세한 매뉴얼을 내놓았지만 그것대로 소설을 써서는 누구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번째 스티븐 킹이 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되는 루트는 여러 경로가 있을 수 있다. 라디오에 나온 작가의 토크쇼도 중요한 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무엇이 되기를 꿈꾼다는 것은 그것에서 참을 수 없는 매력을 발견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한 작가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면 그 작가처럼 되고 싶어진다. 헤르만 헤세나 카프카, 이상의 책을 탐독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 작가 개인들에게 지극한 매력을 느끼고, 그처럼 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파묵의 강연은 오히려 더 많은 작가 지망생을, 혹은 문학의 독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는 미지의 중심부, 많은 문학 독자들이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는 소설의 중심부. 그 풍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중심부를 탐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소설과 소설가>에서 나타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은 욕망의 강연이었다. 이 책에서 대단한 창작기술을 배우기를 기대한다면 구매를 보류하는 것이 좋겠다. 허나 단지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거나, 좋은 작품을 읽고 싶은 기대감에 차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라. 책장을 덮었을 즈음 당신은 적극적인 창작가가 되어 있거나 열렬한 독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소설과 소설가>는 아주 성공적인 창작론서다.
2013. 1. 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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