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산문/리뷰

오이예사 - 인디언 숲으로 가다

멀고느린구름 2012. 12. 16. 09:31
인디언 숲으로 가다 - 4점
오이예사 지음, 장성희 옮김/지식의풍경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와는 다른 사회, '대안사회'를 꿈꾸기 시작했다. 출판시장은 누구보다 민감하게 그 냄새를 맡았고, 온갖 명상서적과 대안사회에 대한 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주류에 '인디언', 거북섬 원주민이 있었다.

 

  21세기 들어 거북섬 원주민에 관한 책은 말 그대로 쏟아졌다. 93년에 출간되었지만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가 새롭게 태어나 각광을 받았고, 역시 <작은 나무야 작은 나무야>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던 포리스터 카터의 책도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로 이름을 바꾸고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유행을 타고 출판사들은 이것저것 짜집기식의 족보 없는 잡탕 서적과 날림 번역으로 일관한 책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당시 한창 거북섬 원주민에 심취해 있던 나는 정말 수도 없는 가짜들과 싸워야 했다.

 

  <인디언 숲으로 가다> 라는 책 역시 '진품'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책이다. 대한민국 번역의 고질적인 불치병 중 하나인 발췌 번역과 짜집기로 이루어진 책인 점도 그렇고, 책의 편집 방향과 이 책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모호한 점도 그렇다.

 

  책을 번역하려면 온전한 한 권의 책을 번역해야지 왜 이 책 저 책에서 뽑아다가 마음대로 짜집기를 하는지... 대한민국의 출판관행은 참으로 문제다. 짜집기를 하려면 최소한 시간 순이라도 맞춰야 할 텐데 <인디언 숲으로 가다>는 그 마저도 엄밀하게 지키지 못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사건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거나(이 책이 소설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이책은 회고록이다), 갑자기 너무 큰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가버리기도 한다.

 

  또 책의 대부분은 다코타 족의 한 갈래인 와페튼 족 남자아이의 원주민 전통 방식의 유년 생활을 묘사하는 것에 할애되어 있으면서 이야기의 결말은 와페튼 족 남자아이가 결국 백인들의 생활을 긍정하고 백인들의 종교가 더욱 훌륭하다고 여기는 장면으로 맺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오이예사는 자신의 유년을 다룬 책 'INDIAN boyhood(1902)'와 백인들 속에서의 삶을 다룬 'FROM civilization to Woods Deep the(1916)' 이 두 권의 책을 썼다. <인디언 숲으로 가다>는 이 둘을 무리하게 짜집기하는 것을 통해 묘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지식의풍경 편집자는 혹시 백인 조상을 두기라도 한 것일까?

 

  이런 여러 오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디언 숲으로 가다>는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국내 번역된 대다수의 거북섬원주민 관련 서적이 '원주민 독립운동가'나, '전통 수호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그런 독립운동가들이 쓴 책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와시추의 편이 된 원주민의 입장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책이다. 그런 탓인지 여러가지 면에서 원주민의 삶이 다르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기존의 책에서 거북섬 원주민은 주로 현자이거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독립운동가, 신비한 주술사 등으로 묘사된다. 와시추가 오기 전 그들의 삶은 너무나 이상적인 것이었고, 그들은 서로 싸우지도 않았고, 자연의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긴 것으로 그려진다. 내가 거북섬 원주민의 책을 읽으면서 특히 주목했던 것이 '타격 가하기'라는 전쟁의 방식과 사냥할 때의 자세였다.

 

  기존의 책들은 거북섬 원주민이 타 부족과 전투를 벌일 때 상대방을 죽이는 것은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 타격만 가하는 것이 더욱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디언 숲으로 가다> 에서 "쿠를 한다" 라고 표현되는 타격 가하기는 전혀 다른 형태로 묘사된다. 적어도 와페튼족에게 있어서 타격 가하기란 활이나 토마호크 등의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위험을 무릎쓰고 적에게 가까이 가서 적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거기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나 존중은 없다. 와페튼 족의 젊은이들은 늘 싸움에 목말라 있으며, 적을 죽이는 것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가지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저 명예를 드높이려는 이유로 다른 부족의 땅을 침략하러 갔다가 몰살 당해버리는 일화도 있다. 오이예사는 반성은 커녕 복수심만을 키우며 그것이 '진정' 와페튼족의 젊은이다운 행동이라고 여긴다. <인디언 숲으로 가다>에서 묘사되는 와페튼족 남자 어린이의 삶이란 완전무결한 '마초'가 되기 위한 삶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몇몇 매체들은 이 책을 어린이를 위한 권장도서 목록에 자랑스럽게 올려놓고 있다. 웃기는 일이다.  

 

  또한 시튼이 쓴 <인디언의 복음>이라는 책에 보면 거북섬 원주민들은 사냥을 할 때 병들고 약한, 즉 어차피 곧 죽을 동물들만 사냥을 하며 사냥을 하기 전과 후에는 반드시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인디언 숲으로 가다>에서 와페튼족에 의한 사냥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며, 사냥 당한 동물에 대한 애도나 감사의 표시는 없거나 극히 간소하다.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때로 남자 어린이들의 놀이가 되고, 때로 어른 남자들의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인디언 숲으로 가다>에서는 오이예사가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해 '위대한 신비'에게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개 오이티카를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대목이 있다. 문화적 차이를 감안한다고 해도 나로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진정 '위대한 신비'가 있다면 오이예사에게 오이티카를 더욱 사랑해주라고 가르쳤을 것이지, 그를 죽여서 자기에게 바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위의 열거한 요소가 유독 와페튼족만의 도드라진 특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와페튼족을 제외한 모든 거북섬 원주민들은 다른 책에 쓰인 것처럼 모두가 현자였으며 성자였고, 용감한 용사였으며, 뛰어난 주술사이자 자연의 친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껏 우리가 보고싶었던 거북섬원주민의 모습만을 추려서 보아왔던 것은 아닐까. 원주민의 후손인 책의 저자 자신들도 말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현재의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과거에서 찾는다. 그러나 현재가 싫다고 하여서 '과거는 모두 좋았다' 라는 감상적 논리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을 와페튼 족의 남자 아이들처럼 마초로 키울 수도 없고, 키워서도 안 된다. 또한 거북섬 원주민의 삶을 지나치게 미화시킨 나머지 우리가 모두 사냥꾼이 되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신에게 자신의 애완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일 또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순환의 역사, 원의 역사를 그저 모든 것이 똑같이 되풀이 되는 것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순환과 원의 역사란 엄밀하게 말하자면 소용돌이의 역사이다. 같은 일이 때로 반복되기도 하지만 인간은 결국 어느 한 반성의 계기를 통해 또 다른 미래의 원으로 조금씩 비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순환의 고리는 과거를 향해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미래를 향해 발산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반성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대안'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만을 추구한다면 머지 않은 미래에 또 다른 와시추나 또 다른 일본제국이 등장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2007. 1.12. 멀고느린구름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