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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정원을 가꾸는 일에 대해 말하고 싶다. 지난 3월, 봄이 되어 아직은 황량했던 학교 소운동장 한 쪽 비탈에 꽃씨를 사다 뿌렸다. 해바라기, 제비, 나리, 봉선화 등등 이름도 고운 꽃의 씨앗들을 아이들이 손수 흙 속에 심었다. 그 때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여름이 된 지금, 소운동장 한 켠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함께 과실나무도 심었다. 0,1학년 아이들이 각자 자기를 닮은 아기 나무들을 한 그루씩 심은 것이다. 5년, 10년이 지난 후에는 아기 나무들도 아이들처럼 부쩍 자라 있을 것이다.
과실나무 중에
포도나무는 특별히 한 곳에 모아 심었다. 5학년 석란이네서 선물한 중년(?) 포도나무가 심어진 자리가 그곳이다. 그곳에 작은
정원을 만들고 벤치도 놓으면 참 좋겠다 싶어 아이들이 떠난 학교에 남아 바윗돌로 울타리를 짓고, 주변에 보이는 풀들 중에 예뻐
보이는 아이들만 몇 포기 옮겨 심었다. 그랬더니 그럴듯한 조그만 정원이 되었다. 내친 김에 간판도 만들어 꽂았다. 청미래 아이들이
쓰던 나무 팻말을 노란색으로 칠하고 보라색으로 '포도정원'이라 이름 붙였다. 사실, 남의 땅에다가 공적인 절차도 없이 내
마음대로 정원을 조성한 터라 엄밀한 불법정원이었지만 나는 그 정원이 마치 내 개인의 정원인 것처럼 정답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그네 벤치가 들어섰고, 방과후에 한가로운 시간이면 그네 벤치에 앉아 정원에 자라는 풀과 나무들을 감상하고, 아이들이 노는 양을
둘러보는 것이 행복한 소일 거리가 되었다.
포도정원에는 총 여섯 그루의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다.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기 나무인 데다 토양이 썩 좋지 않아, 처음 심은 다음날부터 매일매일 학교에 1시간 가량 일찍 등교해서 아이들에게 꼬박꼬박 물을 주고는 했다. 인사를 하고, 잎사귀를 토닥이기도 하며, 물이 모쪼록 잘 소화되어 아기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아주 어린 아기일 때의 포도나무는 물을 며칠만
걸러도 금방 아파하는 기색이 보였다. 아침에 와서 둘러보면 목이 마르다고 밥 좀 달라고 보채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물을 주면
나무에서 꿀꺽꿀꺽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주 큰 나무가 될 때까지 내가 너희들을 지켜줄게라고 다짐하고서는 열심히
물을 주었다. 한 달 가량이 지나 나무가 제법 아기 티를 벗게 되었다. 밑둥도 제법 굵어지고 더 이상 나무 막대기가 아닌 어엿한
어린이 나무 정도가 된 것 같았다. 잘 자라는 주는 것이 고마워 더욱 열심히 물을 먹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어린이가 된 포도나무는 스스로 흙 속에서 양분이나 수분을 잘 흡수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내가 매일 매일 물을 떠먹여 주는 것이 되려 과잉공급이 된 것이었다. 잎이 마르고, 초록빛이 약해지고, 성장이 더져지는
게 눈에 보였다. 매일 물을 주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일찍이 노자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에 맡기자고
마음 먹었다. 포도나무에 정녕 물이 필요하다면 비가 오겠지. 비가 내리면 아이들이 그걸 잘 모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자기 힘으로
가져다 쓸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이제는 포도나무 아가도 그것을 배워야 할 때가 온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며칠 후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포도나무는 더 이상 나의 손길 없이도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근대 초기 서양을 휩쓸었던 계몽주의는 인류에게 서구적 '교육'이라는 새로운
발명품을 선사했다. 그렇게 탄생한 '교육'은 채워져 있지 않는 빈그릇과 같은 인간의 정신에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을 채워넣는
일이었다. 즉, 교육은 무지한 유인원 상태의 인간을 문명인으로 계몽하는 일과 등치되었다. 서양이 근대적 계몽의 열풍에 휩싸여 있을
때, 중국과 한국으로 대표되는 두 유교문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유교문명의 '교육'은 분명 서구적 의미의 계몽과는 달랐다. 계몽이 빈그릇을 채우는 일이라면, 전통의 교육은 바로 그릇 자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아이를 계몽하려는 교사들이 아무리 수많은 지식을 아이의 그릇에 쏟아붓는다고 해도 그 그릇이 머그컵 크기밖에 안
되면 머그컵 이상의 지식과 지혜가 담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그 그릇을 넓히려고 하거나 그 그릇에 쓰임에 맞는 적정한 지식을
채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까지의 서구문명은 그것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채 억지로 그릇에 인류의 지식을 쏟아붓기만 해왔다.
그리고 우리도 근세 이후 그러한 서구식 교육을 답습해왔다.
적어도 우리 파주자유학교가
하고자 하는 '교육'이 바로 그런 서구식 교육의 답습은 아니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 방법이나 형태가 반드시 유교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해도 그 철학적 바탕에는 우리 문명권이 원래 하고자 했던 교육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어떤 그릇인지 깨닫는 것과, 필요하다면 그 그릇을 확장하거나 변형해 나가는 배움이다. 그러한 배움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먼저 나
자신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반드시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한다. 아무리 대단한 소크라테스가 나타나 특유의 문답법으로
캐묻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포도나무 묘목처럼, 우리는 모두 때가 되면 스스로 서야 하고, 스스로 삶의 이치를 배우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쌓은 불안과
공포로 인해 자연의 인간이 얼마나 강인하고, 스스로 설 힘을 지니고 있는지 망각할 때가 많다. 자유롭게 뛰어놀며 자연스럽게 삶의
결을 익혀야 할 아이들에게는 온갖 제약과 의무와 미션들이 주어진다. 이제 그만 물을 주어도 좋을 아이들의 머리 위로 세상은 폭포수
같은 물을 쏟아부어댄다. 이 물을 마셔. 이 물을 마셔야 네가 성공할 수 있어. 그래야 네가 건강할 수 있어. 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가 무엇이 되기 위해 태어났는가, 무엇이 될 수 있고, 무엇으로 인해 행복해질 것인가. 그것은 어른이 판단할 몫이
아니다. 어른은 단지 아이가 택한 삶에 조언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불안을 걷고, 과도한 기대를 접고,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닌, 아이가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 일 때 아이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타고난 그릇을 발견한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더 큰 그릇, 혹은 다른 모양의 그릇으로 자신을 변화시켜볼지 모두 아이가 세상과 부딪치고, 다치며, 싸워가며
터득해야할 것이다. 좋은 부모, 좋은 스승이란 아이에게 위해가 될 모든 요소를 제거해주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되려 먼저 앞서서 그
위험 속으로 들어가, 지혜롭게 그것을 풀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 산 사람의 좋은 본일 것이다.
자연은 결코 인간이란 종을 약하게 빚어내지 않았다. 나무 작대기 같아 손으로 툭 꺾으면 부러질 것 같던 아기 포도나무도 자기의
힘으로 뿌리를 내리고, 물을 빨아올리고, 힘을 만들어 제 몫의 생명을 지켜낸다. 그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 성장해 나간다. 그것은
비단 포도나무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마음대로 캐내어 옮겨 심었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자신의 생명을 끝끝내 지탱해냈다.
조그만 포도정원이지만, 거기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포도정원은 교사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진정 아이들을 믿고 있는가. 아이들 각자 속에 담긴 자연과 그것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그릇의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는가. 나는 어른의 기준으로, 어른의 세상에 선 채로 내 마음의 우물에서 아이를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아이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아이가 성장할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묻도 또 물을 일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 자신이 진정한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아이도 진정한 아이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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