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7

멀고느린구름 2012. 7. 9. 22:53




10


  봉평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에서 소년은 설레고 있었다. 가슴이 7월의 바다처럼 파도질을 했다. 부산시에서 주최한 청소년 권장도서 독후감 공모전에서 소년은 최우수상을 받았다. 소년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 대해서 썼다. 태양이 뜨거워서 사람을 죽인 뫼르소는 휘황찬란한 문명의 네온사인에 지친 인류의 권태를 대변한다고 써서 심사위원의 구미를 맞췄다. 그러나 소년은 <이방인>을 단 한 줄도 읽어본 일이 없었다. 소년이 읽은 것은 낡은 다락방에 있던 세계대백과사전 12편에 있던 작가 소개와 <이방인>의 줄거리 요약이었다.

  소년은 어릴 적부터 거짓말에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타고난 연기력도 갖추었다. 언젠가부터 소년은 자신이 타인을 속이고 있다는 것마저 망각하며 상대를 속이곤 했다. 소년은 알게 되었다. 타인을 속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거짓말과 자신의 마음을 동기화 시키지 않으면 90% 이상의 거짓말 순도를 뽑아낼 수 없었다. 소년은 남을 속이고, 속였다는 사실마저 속였으며, 그런 일을 했다는 기억마저도 자기 속에서 감추어 버리곤 했다. 자신의 거짓말에 쉽게 속아넘어가는 세상과 사람들이 우습기도 했다.

  ‘메밀꽃 필 무렵’은 소년이 좋아하는 소설이었다. 새벽녘의 메밀밭을 언젠가 한 번쯤은 반드시 걷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리도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인원 체크를 끝낸 버스는 대기소에서 출발해 봉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새벽 3시였다.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것은 역시 소설에서처럼 새벽의 메밀밭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버스는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고속도로를 거칠게 질주했다. 차체가 요란하게 덜컹거리는 탓에 아무도 잠을 못잘 것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자 소년을 제외한 모든 이가 잠이 들어 있었다. 소년은 막 잠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메밀꽃밭을 거닐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버스가 봉평 메밀꽃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먼저 온 버스가 두어 대 보였다. 소년이 가장 먼저 내렸다. 10월 초순이었지만 바람은 이미 겨우내였다. 문학기행 진행요원은 이제부터 자유 이동이라고 밝혔다. 아침 9시까지 이효석 생가 앞에만 도착했으라는 전언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무엇부터 해야할지 일행과 상의를 시작했다. 소년은 혼자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은 보름이었다. 크고 흰 달이었다. 해가 떠오르기까지 1시간 남짓이 남았다. 달빛만이 있을 때 메밀밭을 거닐어야 한다고 누구와 언약이라도 한 마냥 소년은 걸음을 재촉했다. 반바지를 입은 소년의 정강이에 이슬 먹은 풀들이 스쳤다. 서늘했다. 호젓한 바람이 불어왔다. 30분 남짓을 걸었을 때, 이제 소년 외의 걸음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얼마를 더 걸어가자 눈 앞이 환해졌다. 코끝을 찌르는 향이 아찔하게 느껴졌다. 메밀밭이었다. 달빛을 받은 메밀밭은 각자가 하나의 위성처럼 빛났다. 단지 궤도를 돌지 않을 뿐이었다. 소년의 가슴에 달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소년은 근처 바위에 걸터 앉았다. 넋을 놓고 풍성한 메밀밭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것을 보기 위한 15년의 인생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주 좋았다. 아주 좋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고 소년은 떠올렸다. 그때였다.

“와아... 이게 메밀꽃 맞아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2012. 7. 9. 멀고느린구름.

'소설 > 긴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완결)  (0) 2012.07.16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8  (0) 2012.07.11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6  (0) 2012.07.01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5  (0) 2012.06.30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4  (0) 2012.06.28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