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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감독의 영화, 말해질 수 없는 말들 


0. 감독 이윤기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해설서를 쓴 소설가 이윤기 씨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분의 흰 머리칼과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중후함은 좋아했다. 

감독 이윤기의 이름을 처음 본 것은 2004넌 [여자, 정혜]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당시 그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매력적인 제목에 이끌렸던 기억이 난다. 주연을 맡은 배우 김지수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였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작가 이윤기의 감독 데뷔작으로 오인하고 있었던 탓에 굳이 찾아볼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 잠시 머물렀던 숙소의 무료 영화 서비스 목록에서 [멋진 하루]를 발견하고 보게 되었다. 순전히 전도연 씨가 나왔기 때문에 켠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그 날이 영화 제목처럼 멋진 하루가 될지는 몰랐다. 


1. 멋진 하루



오래전에 헤어진 두 사람이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300만원 가량의 돈을 빌렸지만 갚지 않은 채 헤어졌다. 시간이 흐른 뒤 여자는 남자에게 돈을 돌려 받기 위해 만난다. 라는 영화의 설정은 당시 나의 개인적인 경험상 남 일 같지 않았다. 무척. 아주. 그랬다. 

담담하게 도시의 곳곳을 비추는 카메라. 뜨거운 햇살로 가득찬 화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여자. 그 속에서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뒤채이는 마음. 사람의 마음에 둔감하지만 그 둔감함으로 인해 삶을 견딜 힘을 주는 남자. 

대단한 사건도 없이, 특별한 대사도 없이 그저 빌려간 돈의 액수를 채우기 위해 이곳저곳 돈을 꾸러 다니는 두 옛 연인의 모습이 서글프면서도 참으로 따스했다. 

한 때 나도 그런 날을 그린 적이 많았다. 아무래도 좋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좋다. 그 사람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으면. 단 하루라도 그 사람과 함께 예전처럼 길을 걷고, 하늘을 보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그렇게 바란 때가 있었다. 

[멋진 하루]는 내가, 혹은 또 다른 누군가가 상상했을 그 멋진 하루를 쓰지도 달지도 않게 내보인다. 배경에서 간간히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그리고 마지막 장면, 전도연의 묘한 미소와 함께 흘러나오는 호란의 목소리. 이바디의 '그리움'은 몇 번을 되풀이해 보아도 마음을 적셔온다. 

이 한 편의 영화를 본 날은 이윤기라는 멋진 '영화감독'을 발견한 멋진 하루가 되었다. 


2.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세상이 현빈의 입대와 그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두 편의 영화로 떠들썩할 때였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무슨 광고 CF보듯 간헐적으로만 보았던 나로서는 현빈이 나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윤기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이유에서만 - '덧붙이자면' 임수정 씨가 출연하기 때문에 - 영화관을 찾았다.

   확실히 [멋진 하루] 만큼 잔상이 오래 남는 영화는 아니었다. 허나 감독의 영화 특유의 가느다란 실 같은 감정의 선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두 배우도 넘치지 않고 깔끔하게 역을 소화해냈다. 집이라는 하나의 공간만을 집요하게 포착하는 독특한 시선도 신선했다. [멋진 하루]가 들어갈 수 없는 마음의 방을 표현했다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헤어날 수 없는 마음의 방이었다. 들어갈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방. 그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3. 아주 특별한 손님 



   한효주 씨가 [봄의 왈츠]라는 윤석호 감독의 계절 드라마 마지막 편에 출현했을 적부터 좋아했다. 그녀가 맡은 배역의 이름이 내 옛 연인의 이름과 닮았었다. 집착이라고 해도 좋은 만큼 그 드라마를 본방 사수했었다. 

  이 영화는 그녀의 첫 영화였다. 당시만 해도 인기 배우가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관심도 적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디브이디를 샀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계속 미루기만 하고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입대까지 하게 되었고 디브이디는 잃어버렸다. 

  최근에야 영화를 보았다. 마음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여자. 여자는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가는 한 중년 남자의 딸로 가장하여 문병을 가게 된다. 주변은 온통 낯선 사람들. 단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에게 사람들은 오래전 행방불명된 딸에 관련된 추억을 늘어놓는다. 말이 없는 여자. 담담히 그 이야기들을 듣기만 한다. 마치 제 속의 공허한 마음을 타인의 이야기로 채우려는 것처럼.  [아주 특별한 손님]은 비어 있는 방에 관한 이야기였다. 

도시와 지방. 낮과 밤. 거부와 용인.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가 또렷하게 대비를 이루는 영화여서 무척 문학적으로 읽혔다. 한효주 씨의 무심한 연기도 썩 괜찮았다. 


4. 여자, 정혜



   공교롭게도 첫 작품을 가장 끝에 보게 된 셈이 되었다. [여자, 정혜]는 감독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린 뒤에야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새벽 영화를 봤다. 좋았다.

  여자는 이 영화 이후의 영화 속 여자들처럼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여자, 정혜는 참 할 말이 많은 사람이란 점이다. 지나치게 할 말이 많기 때문에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 정혜]는 가득 차버린 방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꽉 차 있는 방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고, 본인도 출구를 찾지 못해 나갈 수 없다. 밖으로 나가는 문 앞까지 버릴 수 없는 기억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다. 

  사랑했던 어머니의 기억, 유년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씻을 수 없는 상처 등 너무 무거워서 들어서 옮길 수도 없는 짐을 마음에 두고 산다. 짐을 방 더 들이고 싶지 않아 최소한의 삶,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하지만 그럴 수록 마음은 황량해진다. 누군가 헤집어 놓은 방을 바라보듯이. 고양이를 데려와 기르며 아주 조그만 관계를 시작하지만 이내 부담스러워진다.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스스로 예정된 파국을 만들어가는 일에 다름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별은 오니까. 여자는 그래서 스스로 먼저 이별한다. 떠나고, 보내고, 버린다. 

허나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5. 말해질 수 없는 말들


  아직 또 한 편의 영화 [러브 토크]를 보지 못했다. 좀처럼 디브이디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조만간 필요한 날에 찾게 될 것이다. 

  홍상수 감독처럼 이윤기 감독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에 대해 줄곧 표현한다. 홍상수 쪽이 이면의 욕망이랄까, 본성이랄까 하는 부분을 꼬집는다면 이윤기 쪽은 소통의 가능성에 대해서 계속 질문한다. 사람과 사람은 정말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은 소통의 도구로 '말'을 만들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이 인간의 소통을 가로 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말이 없이 전해질 수 있는 것, 말이 되기 이전의 마음에 대해 감독은 말하고자 한다. 그 말해질 수 없는 말들이야 말로 문학이 표현해낼 수 없는 것, 오직 영화만이 가능한 표현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김지수, 한효주, 전도연, 임수정. 이 배우들의 눈빛으로, 망설이는 손가락과 주저하는 발걸음, 낮은 목소리,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이 말한다. 나를 이해해 줄 수 있겠느냐고. 당신이 이런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말하지 않는 그의 영화들이 참 좋다. 소설은 어쩔 수 없이 계속 말을 쏟아내야 하는 표현의 방법이다. 하지만 분명 말해지지 않는 것 속에 더 내밀하고 진실한 말들이 숨어 있는 법이다. 이윤기의 영화를 통해 나는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더듬더듬 그 마음에 다가가는 걸음마를 배운다. 그의 다음 작품을 말 없이 기다린다. 


2012. 2. 2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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