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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씽이를 잃어버렸다. 여덟 살 무렵의 일로 기억한다. 철로 만들어진 빨간색 몸체에 까만색 손잡이와 바퀴가 사랑스럽던 씽씽이였다. 어린 나에게는 바로 그 씽씽이가 초원을 내달리는 적토마와 같았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장 씽씽이에 올라 좁은 골목길 사이를 누볐다. 씽씽- 바람을 가르던 느낌과 함께 내 곁을 스쳐지나던 20세기의 낮은 시멘트 담벼락과 높이 보이던 도시한옥의 까만 기와들이 생생하다. 내가 살던 동네 가까이에는 어린이대공원이 있었다. 씽씽이를 타고 어린이대공원 입구까지 달려갔다가 돌아오면 저녁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고개를 내밀어 현관에 세워둔 씽씽이가 무사한지 확인하곤 했다. 꿈에서는 당연히 빨간 씽씽이에게 하늘을 나는 기능이 추가되어 있어서, 나는 씽씽이와 함께 중국도 가고, 미국도 갔다.
불행은 갑자기 찾아왔다. 토스트를 만들려고 하니, 슈퍼에서 계란과 식빵을 사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을 받은 일요일 아침. 맛있는 토스트를 아삭 한 입 무는 상상을 하며 신나게 씽씽이를 내달렸다. 슈퍼에 도착해 평소처럼 입구 옆에 씽씽이를 세워두고, 재빨리 계란과 식빵을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나왔다. 아뿔싸. 분명 입구 옆에 세워둔 내 빨간 씽씽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기분을 내 생애 처음으로 느꼈다. 심부름 같은 건 까맣게 잊은 채 온종일 씽씽이를 찾아다녔다. 씽씽이를 타고 지나가는 아이가 있으면 무조건 달려가서 혹시 내 씽씽이가 아닌지 확인했다. 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나를 찾으러 나온 엄마에게 붙잡혀 강제로 집에 끌려가면서도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목놓아 씽씽이를 불렀다. 제발 내가 다 잘못했으니 나에게 돌아와 달라고. 착하게 살 테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끝내 빨간 씽씽이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내 삶이 그닥 선하지 못했던 탓이었을까.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내 나이는 이제 청년보다는 중년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 한 켠에는 아직 유년의 빨간 씽씽이가 기대어 서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맞는지 씽씽이는 이제 ‘스마트모빌리티’라는 멋들어진 명칭의 이동수단 중 하나로, ‘전동 킥보드’가 되어 도시의 화려한 건물들 사이를 누비고 있다. 전동 킥보드를 하나 구입해볼까도 싶었지만, 역시 내 발로 구르지 않는 건 씽씽이라고 할 수 없지 하며 그만두었다. 어른용 수동 킥보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수동 킥보드를 검색하고 있으려니, 내 마음 속 씽씽이가 도르르 도르르 바퀴를 굴리며 나를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성인용 수동 킥보드 타고다니면 어떨까요? 라고 누군가 올린 질문에는 부정적 댓글들이 가득했다. 쪽팔려서 어떻게 타고 다니냐는 비아냥부터 금방 무릎이 상하고 말 거라는 건강 염려까지. 댓글을 읽어내려가다보니 내 마음의 씽씽이도 초라하게 빛이 바래지는 것만 같았다.
뭐 어때?!
오래 망설이다 마음 속으로 힘껏 소리를 지르며, 구매 버튼을 질끈 눌렀다. 비록, 여덟 살의 나는 사랑스런 씽씽이를 소중히 지켜주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오래 아껴주리라 다짐하며 배송을 기다렸다. 나의 새로운 씽씽이가 도착한 날, 곧장 집 근처의 강변길을 달렸다. 씽씽- 선선한 저녁 강가의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여덟 살의 어린 내가 한 송이, 두 송이 새로이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밤이 강의 경계를 지워버릴 때까지 발을 구르고 또 굴렀다. 바다로 이어진 물줄기를 따라 하염없이 달리다 보니 서해에 이르렀다. 비가 갠 뒤의 밤하늘엔 별이 점점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체념하거나, 지금 시작해서 뭐가 될 수 있을까 겁에 질려 하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빨간 씽씽이는 오늘의 내게 “뭐 어때, 해봐.”라고 말해주기 위해 수십 년 내 마음에 기대어 있었나보다. 밤바다가 나지막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만난 씽씽이와 함께 어둠을 밝히는 별을 오래 바라보았다. 작고 작은 빛이 우리를 온통 흔들었다.
2020. 6. 11. 멀고느린구름.
* 2020년 7월, <월간 에세이> 수록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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