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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쓰기 작법서가 참 많다. 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다. 몇 십 번을 고쳤느니, 몇 백 번을 고쳤느니 하는 걸 대단한 장기처럼 뽐내는 것도 마뜩지 않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의 말대로 라면, 그들은 초고가 백 번을 고쳐야 겨우 써먹을 수 있을 만큼 형편 없거나, 도무지 글을 고치는 데 아무런 재주가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두세 번 보아서도 고쳐야 할 곳이 나오는 글이라면 애초에 다시 쓰거나 발표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본다.
책으로 펴내기 위해 예전에 쓴 소설 세 편을 다시 프린트해서 읽었다. 각 편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그럭저럭.
뭐 이따위 걸 썼지.
아니, 어떻게 이런 걸 쓸 수 있었지.
"뭐 이따위 걸 썼지" 라는 판정을 받은 소설은 아예 새로 쓰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도 왠지 괘씸하다는 생각에 울컥 화가 날 정도로 플롯과 문장 모두가 형편 없는 소설이었다. 뻔뻔하게도 저런 걸 발표하고 있었다니 싶다. 그에 반해 "아니, 어떻게 이런 걸 쓸 수 있었지" 라는 생각을 들게 한 소설은 뻔뻔하게도 경이롭다는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잘 쓰여진 소설이었다. 바로 오늘 새벽에 읽은 소설이다. 내가 쓴 문장들이지만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그 문장들의 소모임이 있다면 당장 회원가입 신청서를 내고 싶다. 소설이란 것도 인생과 닮아 있어서 가끔은 행운이 깃든다. 숙련된 작가의 진정한 힘은 우연히 찾아든 그 행운에 누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작품들을 다듬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몇 십 번씩 다듬어대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음악을 레코딩할 때도 수 십 번을 고쳐 부르고, 다시 연주해서 최상의 것만을 골라붙여 한 곡을 만들어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연성과 현장성을 중시해서 그날의 느낌대로 한 번에 부르고 연주해서 녹음을 끝내버리는 이가 있다. 나는 어느 쪽도 아니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후자에 가까운 타입이다. 나를 완벽주의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의아하겠지만, 나는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완전한 감각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말이 그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어떻게 이런 걸 쓸 수 있었지
의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는 작품들을 앞으로도 종종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일일이 퇴고하는 귀찮음을 좀 덜 수 있게 말이다.
이 글의 제목은 물론 낚시였다.
2020. 3. 2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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