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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우리네 마을마다 비자림이 있다면

멀고느린구름 2014. 11. 7. 22:14

비자림에서 가장 오래된 비자나무



우리네 마을마다 비자림이 있다면 

- 멀고느린구름 




비자림은 제주도 제주시의 고지대에 위치한 원시 삼림이다. 수령이 천 년 가까이 된다고 전해지는 새천년 비자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그 나이가 400~800년 정도 되는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서로 가지를 맞대고 있는 거대한 숲이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 해안도로를 일주하는 자전거 하이킹은 두 차례나 해봤지만 ‘비자림’을 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비자림’이란 원시림이 제주도에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차를 몰아서 비자림 입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기대치는 그닥 높지 않았다. 입구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공사를 하고 있어서 어수선했고, 아스팔트로 포장된 진입로는 한림공원 같은 여느 제주도의 관광지와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아스팔트가 끝나고 커다란 비자나무 사이로 난 흙길로 들어서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수 백년 된 비자나무들은 보통 4 ~ 5층 건물 정도의 크기로 자라 있어,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지만 그 가지의 끝을 볼 수 있었다. 그 끝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젖히면, 숲을 온통 뒤덮고 있는 잎새들 사이로 반짝거리며 빛나는 정오의 별들이 있었다. 


멈춰서서 숲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색색깔의 고급 등산복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숲길 사이로 무언가에 쫓기듯 서둘러 지나갔다. 무엇이 그리 바쁠까 싶은 생각. 요즘 사람들은 도시의 작은 언덕에 자리한 공원을 찾을 때조차도 고급 브랜드 상표가 쓰인 등산복을 입고는 한다. 공원의 소담한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그 형광빛이 나는 늘 신경이 쓰였었다. 그러나 비자림에서는 그 튀는 형광빛마저도 압도적인 초록의 향연 속에서 힘을 잃었다. 사람이 만든 그 무엇을 가져다 놓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비자림 속을 관람하고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관람하고 있는 쪽은 어쩌면 비자나무 쪽일지도 몰랐다. 수 백년의 세월 동안 온갖 풍파를 겪으며 자라났을 고목의 입장에서 한 백 년을 살기도 어려운 사람이란 조금은 미숙한 생명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새천년 비자나무가 태어났을 때보다 더 오래전인 약 2500년 전에 살았던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위자연’이라고 하면 마치 경치 좋은 곳에 전원주택을 지어놓고, 별 하는 일 없이 한가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2500년 전 노자가 생각한 무위자연의 의미는 달랐다. 무위(無爲)는 자꾸만 무언가 만들려고 하고, 이루려고 하며, 가지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에 대한 안전장치였다. 사람은 자꾸만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욕심나는 대로 하지 않으려고 힘써야지 균형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自然)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라고 하는 세상의 작동 방식을 서술하는 말이다. 생태계는 자신이 아닌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으로 있기 위해서 만물과 조화를 이루어나간다. 


비자나무 또한 비자나무가 아닌 무엇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화려한 색의 고급 브랜드 옷을 갖춰 입으려고 하지 않으며,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둘러 앞서 나아가지도 않는다. 비자나무는 그저 스스로 그러하게 비자나무로서의 삶을 지켜갈 뿐이다. 그 삶에는 당연히 좌도 우도 없다. 


대부분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은연 중에 우리가 마치 이 세상의 주인인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아간다. 우리의 문제들이 곧 이 지구 전체의 문제이고,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이 세상이 크게 달라진다고 믿고 산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가 믿는 정의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마치 얼마 지나지 않아 천국이 도래하리라고 믿었던 초기 예수 운동의 신자들처럼 강렬한 신념을 갖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손을 꼭 맞잡고 비자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데 비자림 속을 거닐고 있으려니 ‘사람의 정의’라는 것이 저 비자나무가 대지에 뻗어내린 굳센 뿌리에 비하면 참으로 연약하고 허망한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사람이라는 생명체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는 커녕, 지구의 역사로 쳐도 아주 근래에 탄생한 수 많은 생명의 종 중, 하나의 종에 불과한 것이다. 


비자림 속을 거닐며 나는 문득 우리네 마을마다 비자림이 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근대 문명은 풍요로운 문화와 함께 다채로운 예술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문화를 우리로부터 분리시켰다. 좋은 음악을 들으려고 하면 그에 상응한 돈을 내고 공연장을 가야하고, 좋은 그림을 보고 싶다면 역시 표를 사서 미술관을 가야 한다. 문화는 ‘문화 산업’이라는 말처럼 돈과 결부된 무엇이 되었고, 고품질의 문화를 향유하고 싶으면 고품질의 자본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의 본질은 ‘아름다움’이다. 락 페스티벌이나 댄스 클럽에 가서 발산하는 것도 아름다움이고, 예술의 전당에 가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것도 수렴의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의 원천은 결국 대자연에 있을 것이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늘 생동하는 이 지구의 하늘과 땅이야 말로 모든 아름다움의 시원이다.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이 ‘유료’라면 이 지구의 원천적인 아름다움은 ‘무료’다. 하지만 도시는 무료의 아름다움을 자꾸만 줄여가고, 유료의 아름다움으로 그것을 대체하려고 한다. 그럴 수록 경제사정이 좋지 못한 서민들은 점점 더 각박해져가고, 삶의 중요한 한 축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네 마을마다 비자림이 있다면 다를 것이다. 우리가 하교길에, 그리고 퇴근길에 이 비자림을 지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좀 더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오만함을 조금씩 내려놓고 세상과 타인에 대해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더 많은 돈을 가지거나, 더 많은 명예를 쌓아야지만 언젠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지극히 아름다운 어느 한 순간을 늘 만끽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늘 우리 근현대사의 분곡점에 자리한 6. 25 전쟁이 안타깝고, 이후 근대화 과정 - 심지어 최근에도 - 에서 발생한 생태계 훼손이 아쉽다.)


우리 각자가 서로의 위치에서 그토록 외치고 있는 정의란 정녕 무엇일까. 지구라는 별에서 함께 살아가며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돕는 것이 정의의 가장 큰 함의가 아닐까. 비자림은 내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비용을 요구하지 않았다. - 물론, 관리인들은 소액의 입장료를 받았지만^^; - 비자림은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공평하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주었다. 그러면서도 비자림은 스스로가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한 자연은 아이를 닮았다. 어른이 만든 여러 인위적 제약들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은 스스럼 없이 빛난다. 대책 없이 타인에게 관대하고, 아낌없이 사랑을 주면서도, 스스로를 대단한 성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예수도 성자는 아이와 같다고 했다. 아름다운 것을 대하고 감격하며 기분이 좋아지는 까닭은 그 순간 우리 마음 속의 아이다움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나는 비자림의 한 가운데서 신발을 벗고 한동안 아이처럼 맨발로 걸어보았다. 땅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온 발이 조금 거북해 했지만 마음만은 아이가 된 것처럼 두근두근 뛰었었다. 유명한 명소를 찾아다니는 여행 말고, 우리 가까이에 있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고, 그 속에서 쉬고, 어른의 짐들을 좀 내려놓고 아이로 돌아가 맑아지는 경험들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라도 하고 살 수 있다면, 돈이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는 순간들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살 수 있다면 우리의 품이 좀더 깊고 넓어지지 않을까.  


우리네 마을마다 비자림이 없다면, 우리네 마음마다라도 비자림이 있어서, 모두가 이 비자림을 조금씩 닮아갔으면 참 좋겠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감격하고, 아이의 마음이 되어보는 경험들을 많이 해보면 좋겠다. 좋은 정치가 우리를 풍요롭게 할 수 있고, 좋은 제도가 우리 삶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본질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일 것이다. 좋은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바로 비자림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라고 답하겠다. 



201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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