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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論

정치 - 새정치와 반정치를 넘어서

멀고느린구름 2014. 7. 30. 20:20

새(新)정치와 반(反)정치를 넘어서 




1. ‘새정치’의 등장 


‘새 정치’가 아닌 ‘새정치’라는 고유명사는 지난 2011년 안철수 교수가 야권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하면서부터 생겨났다. 유력한 지지를 얻는 정치인이 미미한 지지를 받고 있던 후보에게 전격적으로 후보직을 양보한 것은 우리 정치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기에 ‘아름다운 양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이후 안철수 교수의 대국민 지지율은 폭발적으로 상승하여 박근혜 대세론을 꺾고 박근혜 후보를 대선 후보 2위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결국 정치판에 나올 것이냐 말 것이냐로 설왕설래를 반복하던 중 2012년 9월, 드디어 안철수 교수는 안철수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정가에 새정치의 바람에 폭풍처럼 불어 닥쳤다. 


그러나 막상 정계에 발을 디딘 안철수 후보의 행보는 순탄치 못했다.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새정치의 내용을 묻기 시작했고,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한 안철수 후보로서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했고 사실 내놓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새정치’라고 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 이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자. -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의 내용에 대해 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문재인 후보의 슬로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양자 세력간의 신경전은 갈수록 격화되어 갔다. 결국 2011년과 같은 아름다운 단일화에는 성공하지 못했고, 안철수 후보가 갑작스레 사퇴하는 불협화음 속에서 단일화가 이뤄졌다. 그후 결과는 대선 패배로 나타났다. 


이후 안철수 후보는 노회찬 의원이 삼성의 비리를 폭로한 탓에 법원으로부터 당선무효형을 선고 받아 의원직을 상실한 노원에서 재보선 끝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이후 안철수 의원은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이 있는 정의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진보 지식인인 최장집 교수를 정책 고문으로 두며 진보의 깃발을 올리는 듯 하더니 몇 달 후에는 최장집 교수와 결별하고 보수 인사인 윤여준 전 장관과 함께 하며 중도 성향의 신당 창당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전격적으로 민주당과 제3지대에서 신당을 창당하며 현재는 새정치민주연합(약칭 새정치연합)의 공동대표가 되어 있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43%에 육박했던 안철수 의원의 대선 후보로서의 지지율은 최근 10% 남짓으로 떨어져 4분의 1이 되었다. 이렇게 굳이 안철수 의원의 정치 역정을 소개한 것은 ‘새정치’라는 것이 사실은 무엇이었던가를 이 시점에서 되짚어보기 위함이다. 



2. 그래서 ‘새정치’는 무엇이었을까


안철수 후보는 새정치의 심볼이었다. 그렇다면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4분의 1이 된 지금, 우리 국민들의 새정치에 대한 기대도 4분의 1로 줄어든 것일까.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던 나머지 30%의 사람들은 새정치의 변절자가 되어버린 것일까. 과연 안철수의 새정치가 무엇이었기에 30%의 사람들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가장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과연 ‘새정치’는 무엇이었을까?


안철수 의원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식의 화법으로 말할 때 안철수 의원이 말하는 정치라는 것은 결국 정직한 정치를 말한다. 정정당당하고, 정의롭고, 자신의 안위나 당의 당리당략보다는 사회의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반문해볼 수 있다. 어째서 그것이 ‘새’정치인가? 안철수 의원이 자신이 생각한 그 정직한 정치를 새정치라고 호명하는 순간, 안철수 의원이 행하는 정치 외의 모든 정치는 헌 정치가 되어버린다. 안철수 의원의 정치가 곧 새로운 정치이므로, 김대중의 정치도, 박정희의 정치도 결국은 모두 헌정치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 담론이 가장 파괴력을 발휘했을 때는 그가 정치권에 발을 담그기 이전이었다. 안철수 의원 스스로가 정치인이 아니고 정치 행위의 수혜자였을 때는 정치권가 선을 긋고, 스스로를 비평가의 입장에 쉽게 놓아둘 수 있었다. 정치 비평가의 눈으로 요즘 정치는 글러 먹었어! 라고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비평가로서 중립을 지키며 여당도 야당도 모두 잘못하고 있다고 호통을 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매우 도덕적이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대중적인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그렇게 공평하게 호통을 치면 누구나 박수를 칠 수밖에 없다. 보수든 진보든 할 수 없이 한 쪽의 편을 들고는 있지만 고도의 정략적인 정치 행위나 정치인들의 부도덕성에는 회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가득한 것이다. 정치 자체에 대한 반감, 회의 의식. 우리는 그것을 반(反)정치라고 부른다. 김대중에게서도 싫은 점이 있고, 박정희에게서도 싫은 점이 당연히 있다. 이 싫은 점의 공통분모를 모으면 곧 반정치가 되지 않을까.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 담론은 이 반정치 의식을 지닌 사람들의 생각에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당신들의 생각이 곧 ‘새정치’라고. 뭔가 이 세상에 대해, 정치 행위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고,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느껴지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새정치라고 불리워진 것이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도 있다. 뚜렷한 방향성을 갖고 복지국가 수립이나 진보적인 정권 창출 등의 기대를 새정치에 걸었던 이들도 있다. 안철수 의원도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책에서 상당 부분 그들과 궤를 같이하는 스스로의 생각을 밝힌 면도 있었다. 


만약! 안철수 의원이 의원이 아닌 대통령 안철수로 존재할 수 있었다면, 그러니까 정치인이라기보다 국가를 균형 있게 운영하는 행정가로서의 대통령으로 좋은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정치와 진보적인 정치 사이의 균형을 잡아가며 <안철수의 생각>에서 피력한 낮은 단계의 비전을 보다 구체적인 것들로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정가가 아닌 정치인이라는 자리는 특히 국회의원이라는 자리는 안철수 의원식의 ‘새정치’를 구현하기에 적절한 자리가 아니다. 정당에 적을 둔 정치인은 비평가 행세를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명석한 비평가로서 보수 진보 양 진영에 두루 독자를 두고 있었던 유시민 전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고 10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정치인은 국민 개개인이 내지 못하는 목소리를 대신 내어주는 직업이다. 정당이라는 것은 특정 그룹의 국민들의 목소리를 모아놓은 집단이고, 국민에 의해 선출된 이 집단은 자신을 뽑아 준 이들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잘 살피고 그것을 대변하고, 정책에 반영하고, 입법을 하며 그 특정 집단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한다. 유능한 정치인이란, 넉살 좋은 이웃집 아저씨나, 덕담을 해주는 종교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유능한 정치인이란, 결국 자신을 뽑아준 이들의 의지를 국가를 상대로 관철시켜내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을 유능하게 해냈던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이 둘의 정치를 헌정치로 구분하는 순간 새정치는 가야할 곳을 잃는다. 새정치는 그렇다면 김대중도 아니고 박정희도 아닌, 노무현도 아니고 이명박도 아닌, 그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 새정치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당연할 것이다. 그런 정치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정치’라는 단어가 포함하는 여러가지 성질을 벗어난 곳에 새로운 명사 ‘새정치’가 자리잡았던 거이다.    



3.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는 애초에 잘못된 명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이 ‘새정치’였을까? 사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비전’이 아니었을까. ‘새정치’를 한다는 것과 ‘새로운 비전’을 갖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새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면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뭘 반대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비전을 이루겠다고 천명하고, 누군가가 새로운 비전을 내세운다면 그 비전에 반대하는 무수한 사람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진정 자신의 비전이 옳다고 여기는 정치인이라면 끝까지 자신의 비전을 설득하고, 홍보하여 자신의 의지를 국민들의 투표로서 관철시켜 내려 할 것이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새정치’가 아니라, ‘복지’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 모델에 대한 비전이었다. 누가 그 비전을 더욱 현실적으로 실현해낼 수 있는가 하는 싸움이었다. 야권이 ‘새정치’에 몰두하는 사이 여권은 명석하게 유권자들의 마음을 꿰뚫었다. - 물론, 다른 여러 수단을 함께 사용하면서 - 


지금 그토록 부르짖던 ‘새정치’는 어디에 있는가. 새정치민주연합에 새정치가 있다고 여기는 유권자들은 안철수 의원을 대선 후보로 지지하는 10% 남짓의 사람들일 것이다. 새정치 속에서 진보적인 열망을 찾았던 사람들은 최장집 교수와 함께 새정치를 떠났고, 반정치의 이름표를 얻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시 무당층이 되었으며, 이제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합리적 보수, 혹은 중도의 입장을 지녔던 사람들일 것이다. 옛 민주당의 오른쪽을 담당했던 사람들과 이들 사이의 차이는 도덕적인 고결함의 차이, 혹은 정치적 능숙함의 차이 정도가 아닐까. 깨끗한 정치인은 물론 부패한 정치인 보다 낫다. 그러나 손을 깨끗이 잘 씻는 사람이 꼭 물건을 잘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정치의 분노를 품에 안고 새정치라는 이름표를 달았던 그 열망은 이제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 안철수 의원은 물론 훌륭한 사람이고, 정치인으로서의 그에 대해 나 역시 여전한 기대를 걸고 있다. 그가 그를 지지했던 국민들의 메시지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념을 잃지 않고 청렴함을 지킬 것이라고도 기대한다. 그는 좋은 정치인이다. 지나치게 한 개인에게 과분한 기대를 걸어서 멀쩡히 자신의 인생을 사는 사람을 진흙탕에 불러들여 놓고 이제와서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거꾸로 덮어놓고 비난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의하지 않는다. 안철수 의원은 노회한 정치인이 아니라 신인이다. 신인 정치인으로서 그는 여러 유혹을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이상 ‘새정치’라고 하는 과도한 기대를 그에게 걸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안철수 교수가 후보에서 의원이 된 순간, 새정치는 이미 그에게는 점점 이루기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안철수 의원에 대한 기대는 이제 아주 청렴하고 올바른 생각을 가진 정치인 한 명을 얻은 것에서 그만 그치는 것은 어떨까. 


새정치에 대한 기대의 좌절과 실망, 그리고 분노를 안철수 개인에게 돌리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새정치와 반정치를 넘어서 새로운 ‘비전’을 다시 공고하게 구축하고 합의해 가야 하지 않을까.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거짓된 약속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뿌리가 깊은 비전을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닌 우리 개인 각자의 생각에서부터 싹트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안철수의 생각, 혹은 문재인의 생각, 또는 김무성의 생각, 그리고 또 다른 누구의 생각에 기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한 정치인의 생각을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거꾸로 한 사람의 정직한 정치인이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토대를 쌓아가야 하지 않을까. 



4. 새정치와 반정치를 넘어서 


우리 각자의 생각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생각 속에 갇히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 사회는 서로 합의하지 못하고, 서로의 생각 속에 단단히 갇혀 서로에 대해 끝없이 투쟁하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우선, 상대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하루 종일 보수 종편 채널을 틀어놓는 사람의 생각을, 혹은 하루 종일 트위터에서 진보인사의 트윗을 리트윗하는 이들의 생각을. 우리가 각자 지닌 공포를, 혹은 우리들 각자가 지닌 꿈을 조금씩 나눠가지는 일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우리가 서로 합의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 대화를 통해서 어쩌면 우리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과, 일부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서로 나뉠지도 모른다.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제거’하지 않고 인정하는 체제다. 다만, 일부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일부분을 열심히 공유하고, 그 공유의 영역을 점점 넓혀갈 수도 있지 않을까. 


여전히 반정치에 새정치의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것도 곤란한 일일 것이다. 최근 지방 선거나 재보궐 선거에서 항상 정당의 세력에서 밀리는 쪽이 들고 나오는 논리가 인물론이었다. 정당은 약하지만 인물이 좋다는 논리다. SNS에서 새정치에 대한 여전한 미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내세우는 것도 인물 투표론이었다. 깨끗하고 좋은 인물에 투표하면 좋은 정치를 할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둔 논리이다. 하지만 우리가 큰 비용을 지불하면서 정치인을 꼭 뽑는 것이 훌륭한 누군가에게 훌륭한 직장을 마련해주기 위해서가 아님은 분명하다. 정치인이 싫기 때문에 그저 가장 기성 정치인 같지 않은 사람을 정치인으로 만들어주면 그가 과연 훌륭한 정치를 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정치인을 뽑는 것은 우리의 의사를 대의하기 위해서라는 근원적인 선거의 목적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청렴한 인물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우리의 의사를 대변할 의지와 능력이 분명하지 않다면 투표라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된다. 어떤 후보가 우리의 의사를 대변할 의지가 확고한 것인지 아닌지는 결국 그가 속한 정당과, 그 정당의 평소 정치 행위와 그 행위에 있어서의 열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마한 후보가 무소속이라면 그 사람 개인의 삶을 최대한 돌아볼 수 밖에 없지만, 우리가 속속들이 한 개인의 개인사를 전부 살펴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역시 속한 정당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판단의 근거가 될 것이다. 


물론,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은 양당제로 고착화되어 가고 있고, 국민들의 의사가 이 양당을 통해서는 충분히 대의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분명 선거제도를 고쳐서 보완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거제도가 고쳐지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최대한 우리는 각자의 소신을 표로 행사해 갈 수밖에 없고, 단합된 여권에 비해 분열되어 있는 야권의 현실 속에서 서로 비슷한 가치를 지향하는 한이라면 서로 다른 정당 후보들 간에 부득불 단일화를 요청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정당 간의 단일화는 분명 ‘야합’이라고 불리울 소지가 다분한 왜곡된 정치행위이다. 이런 불필요한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양한 민의를 대변할 수 있는 선거제도로의 개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새누리당이 제대로 된 보수의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질책하는 보수논객들도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이들의 민의를 대변할 정당 역시 의회에 자리 잡을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지난 대선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표어 하나를 고르자면, 역시 손학규 후보가 내세웠던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표어는 고단한 삶을 암시하는 동시에 무언가 아름다운 꿈을 연상하게 만든다. 보수적 생각을 지닌 사람이든, 진보적 생각을 지닌 사람이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저녁은 고단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 누구나 한 번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아름다운 꿈을 꾸어보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런 작은 이야기로부터 대화를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대화 속에서 어쩌면 새정치와 반정치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비전’을 떠올려낼 수도 있지 않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2014. 7. 3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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