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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눈 돌리지 않는 삶
왜, '우아한 거짓말'인 걸까? 항상 궁금하던 것은 그것이었다. 영화를 본 후에도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극 중에서 죽은 '천지'가 자신의 고통을 가족들에게 숨긴 채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어째서 '우아한' 거짓말인 걸까. 의문은 의외의 곳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이 리뷰를 쓰기 위해 포스터 이미지를 찾던 중에 발견한 다음 이미지 덕분이다.
'우아한 거짓말'은 죽은 천지의 것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모두의 것이었다. 아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가 조금씩 거짓말을 하고 살아간다. 대체로 그 거짓말들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 많다. 가령, 직장에 지각을 했을 때 하는 사소한 거짓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늦잠을 자서" 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우리는 굳이 "갑자기 교통 체증이 생겨서"라고 거짓말을 한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에게 그동안 잘 지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일단 잘 지냈다고 하게 된다. 우리는 각자 무의식 중에 우리 삶의 품위를 지키려고 한다. 우리 삶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하는 거짓말. 그것을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김려령 작가는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이름한 것이 아닐까.
<우아한 거짓말>은 여러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어떤 입장에서, 어떤 주제에 중점을 두어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갈래로 해석이 나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부장적 남성과 폭력성에 저항하는 여성들과 약자들의 연대로 풀이할 수도 있겠고, 학교 폭력으로 희생된 아이를 통해 왕따 문화의 폐해를 고발하는 영화로 볼 수도 있다. 좀 더 큰 범주로 본다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 문화와 거기에 대항하는 반문화의 대결로 읽어낼 수도 있다.
나는 대체로 여성성을 구심으로 한 연대와 왕따 문화라는 두 키워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 속에서 여중생인 '천지'는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 탓에 학교에서 '은따(은근히 따돌림)'를 당한다. 힘들게 사귄 친구도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외적인 요소에 의해 잃고 만다. 혼자가 된 천지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수집하는 것만이 목적인 '화연'에게 의지하지만 공허할 뿐이다. 깊은 공허와 상처는 결국 천지를 죽음으로 내몬다.
영화는 천지의 언니인 만지의 시점에서 천지의 죽음을 둘러 싼 진실을 파헤쳐나간다. 붉은 실타래가 풀어지듯 감춰져 있던 진실이 하나 둘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흔히 보아왔던 헐리우드 영화처럼 통쾌한 복수를 하거나, 명쾌하게 선과 악을 판가름하여 우리의 적을 드러내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 될 수록, 우리는 누구에게도 복수를 할 수 없게 되고 만다. 누구도 분명한 악이라고, 네가 바로 나쁜 놈이라고 소리 지를 수 없게 만든다.
가장 극단적 폭력의 결과인 죽음을 통해, 영화 속의 여성들은 각자가 처한 폭력의 상황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샌가 자신들이 그 삶 속에 길들여져 있음을, 무심해져 있음을, 그 무심함이 우연히 가장 작고 여린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간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 삶에 진범은 없는지도 모른다. 무수한 공범이 있을 뿐.
청해진 해운의 세월호가 수 백명의 생명을 삼켜버린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정부는 벌써 세월호를 잊은 것만 같다. 세월호를 바닷 속으로 침몰 시킨 것이 유병언 회장 일가일까. 유병언 회장 일가를 찾아내어 엄벌을 주면 더 이상의 세월호는 없게 되는 것일까. <우아한 거짓말>에서 고등학생에 불과한 언니 만지는 가장 천지를 괴롭게 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던 화연을 찾아 그 혐의를 확인하지만 되려 어긋나고 있는 화연의 삶을 바로 잡아준다. 우리 정부가 영화 속 고등학생보다 못한 판단을 해서야 되겠는가.
천지가 죽인 화연을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헐리우드 영화식 해결법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결코 헐리우드 영화가 아니다. 우리 삶이 모인 우리 사회가 어긋나고 있는 것은, 불의가 횡행하고 있는 일은 결코 소수의 악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어긋나버린 것은, 세월호가 침몰하고 만 것은 불의에 침묵해버린, '우아한 거짓말' 속에 자신을 감춰버린 우리들의 무심함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오래전 중학생 시절의 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가난했고, 왜소했으며, 성적과 성격이 나빴다. '왕따'라는 단어가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기 이전이었으나 나는 반 학생 모두에게 따돌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했다. 학교의 일진들에게 삥을 뜯기거나(돈이나 물건 등을 빼앗기는 일), 물건을 훔칠 때 망을 보도록 강요 당하거나 했다. 그러나 내가 그들보다 더 힘이 센 이의 친동생이란 게 알려지고, 내 학업 성적이 조금씩 상승함에 따라 그런 행위는 조금씩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자연스럽게 내가 가장 가깝게 지내던 내 친구에게 그 행위를 옮겨가서 똑같이 행했다. 그 친구는 나보다 더 가난했고, 나보다 더 힘이 약했으며, 성적을 올릴 수 있는 방법도, 보호해줄 힘 센 형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가장 친한 친구를 괴롭히는 이들과 그들의 행위에 대해 눈을 감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우아한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원래 친구가 없었다. 지금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아이는 나와 그렇게까지 대단히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나에겐 그 아이를 구할 의무도 힘도 없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비겁하고 나약했던 그 시절을 나는 좀처럼 떠올려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3년이란 시간쯤은 쉽게 마음 속에 봉인해둘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눈 감는 만큼, 비겁해지는 만큼, 우리의 삶이 거짓으로 우아해지는 만큼,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더 약한 누군가가, 우리가 지켜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악이 없는 것처럼, 분명한 선도 없다. 영웅을 기다리지 말자. 투표일에 좋은 정치인을 선출하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가 모두 끝난다고 여기지 말자.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쉽게 저지르고 마는 우아한 거짓말이다.
<우아한 거짓말>의 인물들 중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누구의 구원자가 되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각자가 눈 돌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서로의 힘을 모을 때, 서로에게 기댈 곳을 빌려줄 때 그 따스한 연대가 진실한 구원의 길을 새롭게 열게 된다. 천지의 마지막 유서에 쓰인 메시지가 가슴을 파고든다.
"잘 지내고 있지? 지나고 나니 별 거 아니지? 고마워, 잘 견뎌줘서."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자랑스럽게 저 말에 답할 수 있을까. 모쪼록 나는, 진정으로 잘 지냈다고 답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2014. 6. 2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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