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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할머니와 살던 그 집

멀고느린구름 2014. 4. 10. 13:32




할머니와 살던 그 집 




할머니와 살던 그 집은 오르막길을 1킬로미터 이상 걸어 올라가야 하는 산자락에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던 달동네 마을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불이 꺼진 집은 내가 살던 집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오시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 집에도 불이 켜졌다. 할머니가 오기 전에는 아버지와 둘이서 살던 집이었다. 없는 살림을 보충하려 아버지는 야근을 하기 일쑤였다. 


불이 꺼진 집은 쓸쓸한 기분도 선사했지만, 어쩐지 다 자라 독립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주었었다. 집에 돌아와 불을 켜고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을 때는 짐짓 직장인의 비애 같은 것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러던 것이 할머니가  오신 뒤로는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우선, 집에 불이 켜졌고, 나는 더 이상 어른 행세를 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할머니에게 반찬 투정이나 하는 철없는 중고생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위암을 앓던 시절 한 종교를 알게 되셨고, 그에 대한 신앙의 힘으로 위암을 극복하셨다. 그 종교의 이름은 ‘남묘호랭게교’라고 하는 국제적인 불교 종파 중의 하나로, 단순한 주문을 계속 외우는 것만으로도 극락왕생할 수있다는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는 종교이다. 나는 수 년간 그 주문을 들으며 자랐다. 주문에 대한 효험을 믿고 외우는 사람 입장에서야 몰입을 통해 마치 명상 수행을 한 것 같은 평온함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할머니의 목소리는 까랑까랑한 하이톤이어서 방문을 닿아놓아도 음악을 틀어놓아도 주문은 내 귓전을 떠돌았다. 


청소년 시절의 나는 그 주문을 매우 싫어했고, 그 마음은 곧 할머니에게로 전이되었다. 고우셨던 어머니가 있어야 할 자리를 괴상한 주문을 외우는 할머니가 차지하고 있다는 어린 생각이 솟아날 때면 ‘식사 거부’라는 방식으로 할머니에게 항의를 하고는 했다. 할머니는 삼시 세끼를 아주 정확한 시간에 차려서 내 앞에 내놓고는 하셨는데 나는 밥 생각이 이미 없어졌을 때도 할머니가 상을 다 차리는 것을 기다린 다음에야 밥 먹기 싫다고 선언하는 고약한 짓을 여러 차례 자행하곤 했다. 그러던 중 어떤 하루의 일을 계기로 나는 할머니에 대한 태도를 조금 바꾸게 되었다. 


할머니가 집에 들어오시고 수 개월이 흐른 뒤의 어느 여름 방학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창 밖에서는 매미가 종일 울어댔고, 뜨거운 햇발이 안방까지 길게 넘어왔다. 할머니는 방 귀퉁이에서 벽을 보고 앉아 “남묘호랭게교, 남묘호랭게교”를 반복하는 주문을 외우고 계셨고 나는 방바닥에 옆구리를 대고 누워서 채널 V에서 종일 방영되는 뮤직비디오들을 보고 있었다. 여름 바다로 당장 달려가지 않고 뭐하고 있냐고 훈계하는 듯한 몇 편의 유행가들이 지나고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머나먼 길 떠나는 사람처럼… 마치 배웅나온 것처럼…”


이라고 시작되는 노래. 윤종신의 ‘배웅’이었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치고 일어나 앉아 목을 빼고 작은 TV 속의 영상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하게 되었다. 한 번도 직접 느껴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대나무 숲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노래가 다 끝나갈 즈음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할머니의 주문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가 싶어 고개를 뒤로 돌렸더니, 할머니도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계셨다. 할머니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저게 누기 노래고?”


나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가수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잠시간의 버벅거리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윤종신’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할머니에게 가수의 이름을 말했다. 할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노래 좋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다시 무심히 등을 돌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슨 이유여서 였을까. 어린 나이에도 내가 할머니께 했던 못된 악행들이 그제서야 반성이 된 것일까. 나를 바라보며 노래의 주인공을 묻던 할머니의 눈빛과 목소리가 너무나 너그러워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그날의 햇볕이 너무나 싱그럽고 다정해서였을까. 그로부터 아주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그때이 내 감정의 소이연을 조금 알 것 같다. 아마도 나는 그날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우리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동질감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먼 사람으로만 여겼던 할머니가 실은 나처럼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할 줄 아는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니. 


그 일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새벽이었다. 작은 방에서 일찍 잠에서 깬 내 귀로 안방에서 할머니가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날이면 귀를 틀어 막아 버리거나 고약하게 음악을 크게 틀어버렸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할머니의 주문을 들었다. 그러다 할머니가 주문의 중간 중간마다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둘째 아들, 하는 일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손주 명운이 몸 건강하게 해주시고, 우리 명진이 공부 잘해서 성공하게 해주시고….” 


나는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아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고 이불 속에서 조용히 어깨만 들썩였다. 


그리고서 손자와 할머니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고 이 글을 끝내면 좋을텐데 고교생의 사춘기 호르몬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날 이후로도 나는 때때로 할머니에게 고약한 투정을 부리곤 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주문을 외우는 할머니를 경멸하는 짓은 다시는 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서 할머니와 살던 그 집을 떠나온 이후부터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주 단편적인 것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인상적인 것은 내가 고향 집에 돌아갔을 때마다 항상 끓여져 있던 김칫국이다. 할머니는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항상 내가 가장 좋아했던 김칫국을 한 달은 먹어도 족할 만큼 끓여놓고는 하셨던 것이다. 그래도 대학생이 되어 철이 좀 들었던 나는 군말 없이 그 김칫국을 방학 내내 다 먹고 왔다. 그때 그렇게 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나와 함께 그 집에서 살았던 할머니는 지난 월요일에 좋은 세상으로 떠나셨다. 내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남묘호랭게교와 윤종신의 배웅, 그리고 김칫국으로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그 기억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나 눈가에 모여 샘이 되곤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창원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오래 치매를 앓으셔서, 나를 항상 대학에 입학하던 시절의 아이로 기억하셨다. 그래서 매년 명절 때 찾아가면 학교를 잘 다니느냐고, 우리 명진이가 좋은 학교 가서 정말 다행이라며 내 손등을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가장 행복하셨던 시절의 기억을 안고 가셔서 다행이다 싶다. 못되먹은 태도를 보였던 어린 시절의 나를 지금 와서 후회해도 별 수 없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나는 나를 돌이켜 꾸짖게 되고 만다. 


할머니를 보내고 고향을 떠나기 전에 할머니와 살던 그 집에 다시 들렀다. 그때에도 퇴락한 달동네였는데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집 앞에는 노란 프리지아가 핀 조그만 화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외벽을 쓸어보며 할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돌아서니 그 사이에 노란 프리지아 사이로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나비는 프리지아 사이를 그 옛날 여름의 싱그럽던 햇볕처럼, 대나무 숲 사이를 지나는 바람처럼 날다가 먼 하늘로 떠올라 날아갔다. 나는 오래 오래 그 자리에 서서 나비를 배웅했다. 




201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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