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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 6점
황현산 지음/난다


밤의 선생을 기다리며 


  '밤이 선생이다' 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황현산 선생님 - 재학하던 학교의 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셨던 분이고, 학부시절 불문학과 수업을 들으러 다녔을 때도 수 차례 뵌 적이 있기에 '님'자를 붙여서 예를 갖추고자 한다 의 지난 산문을 모아 엮은 <밤이 선생이다>의 표지에는 어둠 속에서 흰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둠과 노인의 몸은 경계를 잃고 서로 이어져 있다. 어둠 속에서 글을 쓰는 손과 문장들이 만들어고 있을 머리, 그리고 글이 쓰여질 백지만이 환하다. 아마도 '밤'이라는 것은 엄혹한 세상이나 인생의 어두운 시기를 뜻할 것이다. 그런 것이 선생이라는 것은 곧 고난이 우리를 성장케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상투적인 금언이지만 새로운 표현 속에 잘 담았다. 표지와 제목이 무척 조화를 이루고 있어 책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유달리 신경을 쓰는 나 같은 인간에게는 매우 탐나는 물건이다. 자연스레 책에 손이 갔다. 차례의 마지막 항목에서 '삼가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읽는다' 라는 부분을 발견하고 책장을 넘겨 마지막 장을 읽어내려 갔다. 곧 이 책은 내 서가에 꽂히게 되었다. 

  일전에 나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아프게 비판하는 서평을 쓴 일이 있다. 그 뒤로도 서점가에는 '김난도류'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중견 교수들의 산문집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안타깝게도 별달리 읽을 만한 책은 발견하지 못했다. 

  황현산 선생님의 이번 책 <밤이 선생이다>는 확실히 '김난도류'의 책은 아니다. 허나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를 밝힐 '등불' 같은 책이라고는 또 일컬을 수 없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책의 제목을 본문이 견디지 못하는 경우다. 처음 책을 잡았을 때는 새벽까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어내려갔었다. 정말 훌륭한 책이라고 호들갑스럽게 트윗글을 올리기도 했을 정도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 고급 수트를 보는 것 같은 매끄러운 구성. 온화한 감성과 날카로운 지성. 우리가 지식인에게 바라는 정확한 모습을 황현산 선생님은 구현하고 있었다. 군대 문제에 대한 마초스럽지 않은 접근과 용산 사태, 영어몰입교육, 민주주의의 후퇴, 구럼비 등 사회 현실에 대한 진보적 통찰은 이 분이 여전히 청년의 영혼을 잃지 않고 있구나 감탄하게 했다. 잊혀진 백사마을을 복원시키고, 아이스크림카를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미학을 길어올릴 때까지만 해도 감동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3부에 들어서자 더 이상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마치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장거리 마라톤을 뛰는 느낌이었다. 점점 더 버거워져서 한 동안 책을 덮어두었다가 드문드문 한 챕터씩 힙겹게 읽어보게 되었다. 그 사이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한달음에 완독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장거리 주자(하루키)와 단거리 주자(황현산 선생님)의 차이는 명백했다.  

  내가 어째서 황현산 선생님의 글에 그만 물리게 된 것일까 오래 고심해보았다. 답이 나왔다. 첫째, 하루키의 글이 오래도록 물리지 않았던 것은 그가 쓰기 전에 미리 장거리를 뛸 것을 예정해두고 썼기 때문이다. 반면 황현산 선생님의 글은 오래 전에 써둔 단편적인 글을 이리저리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둘째, 하루키의 글에는 누가 읽어도 이것은 하루키의 글이라고 할만한 것이 녹아들어 있지만, 묘하게도 하루키 자신은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는 법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하루키의 글을 읽고 있으면 우리 자신이 마치 하루키가 된 것처럼 그가 보는 세상과 현상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게 되고 만다. 하지만 황현산 선생님의 글은 그 정 반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글을 읽으면 읽을 수록 책의 표지처럼 글을 쓰고 있는 황현산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점점 글쓴이가 가리키고자 하는 달을 바라보게 되기 보다는 그 손가락이 참 곱구나 하는데 마음이 머물러버린다. 외람된 표현이나 우리는 이런 것을 두고 '자기 과시적인 글쓰기'라고 이른다. 황현산 선생님의 고매한 정신은 잘 알겠다. 하지만 애초에 과녘을 맞출 생각이 없는 화살의 궤적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허망한 일이다. 

  그럼에도 <밤이 선생이다>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보다는 곱절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 한 시대를 지나온 지식인이 고민하는 지점들, 풀어가는 생각들을 바라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전쟁'에 지친 우리 시대를 위로하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 허나 좀 더 욕심이 난다. 예전의 글들을 가려 뽑은 것이 아니라 진정 과녘을 정확히 명중시키기 위해 쓴 글을, 진정 '밤의 선생'이 써내려간 등불 같은 글을 한달음에 밤 새워 읽어보고 싶다. 책장을 덮고 나니 그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뱀발 : 우리 시대 원로의 글에 목마른 분들께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계림수필> 일독을 추천합니다. 


2013. 11. 2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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