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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9

멀고느린구름 2013. 10. 20. 19:03




나 : 할머님, 혹시 무섭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곱단 : 무섭기는...

나 : 그래도 당시로 치면 빨갱이라고 하면 피난민들한테 공포였을 텐데요. 뭐 흔한 예로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했다가 살해 당한 애 얘기 같은 건 저도 어릴 때 구구단 외우듯이 듣고 자랐거든요. 

곱단 : 선생님이 전쟁을 몰라서 그래요. 

나 : 아, 저 할머님. 선생님은 안 쓰시기로 하셨잖아요.

곱단 : 아 참, 미안해요. 

나 : 아, 아닙니다. 

곱단 : 전쟁 통에는 빨갱이고 연합군이고 없어요. 적어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나를 죽이려는 사람과 죽일 생각은 없는 사람, 그렇게만 나눠져요. 빨갱이라고 해서 있는 대로 사람을 다 죽이고 다닌 건 아니었죠. 마찬가지로 연합군이라고 사람을 다 살려준 건 아니었어....

나 : 그랬군요...

곱단 : 그랬죠. 지금이야 법이 있고 세상도 많이 달라졌으니까... 그런 일은 없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사람의 생각이 사람 위에 있었던 것 같아요. 죽이지 않은 사람이 죽고, 죽인 사람은 살기도 하고... 그랬지요. 사람이 먼저가 아니었으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일 같은 건 너무 흔해서 귀하지 않았던 거야. 어른이고 아이고 남자고 여자고 좀 더 오래 가는 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들에 욕심이 났지. 내 목숨이 내일도 이어질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나 : 네...


  헤어진 연인에게 권태를 느꼈었다. 연인에 대한 권태는 곧 나에 대한 권태로 그리고 삶에 대한 권태로 쉽게 전염됐다. 요즘 하루하루가 좀 지겨워 라고 말하게 되는 날들이 늘어갔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연인은 공감을 표하듯 쓸쓸한 표정을 짓고 했었다. 문득, 과연 그것이 공감의 표현이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 헤어진 다음날부터 참을 수 없는 심심함을 견딜 수 없어, 2주 내내 비디오게임을 하고 만화책을 읽고, 공중파 드라마들을 몰아서 보았다. 새로운 자극들, 새로운 이야기들에 목말랐다. 매일 매일 새로운 스테이지를 클리어 하고, 새로운 장면을 읽고,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몰입했다. 하지만 이내 삶 자체는  밀폐형 반찬용기 속에 갇혀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용기는 투명해서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내가 사는 세계는 참 넓고 다양한 표정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정작 나는 이미 닫혀버린 세계 속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말은 모순이 되겠지만 변화를 반복하는 삶일 뿐이었다.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오르고 있는 김곱단 할머니를 이윽이 바라본다. 할머니의 삶은 훨씬 단조로웠을지 모른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들을 모두 통과해오긴 했으나 한 개인의 삶이 그만큼 다채로웠을까. 권태가 자리잡지 못할 만큼 빛이 났을까. 


나 : 할머님, 갑자기 이런 질문 드려서 곤란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할머님, 지금껏 살아오신 게 행복하세요,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세요?

곱단 : 그게 뭐 곤란한 질문인가요... 글쎄요... 사는 건 저마다 다 달라서 내가 하는 말이 다는 아닐 거에요. 그래도 내 대답을 묻는다면요... 음... 그래요. 그때 내가 그이한테 들려준 말을 난 아직 기억해요. 그 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으니까... 내가 산 건 행복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예쁘죠. 꽃도, 노래도, 사람도 다 참말 예뻤지요.  

나 : 혹시, 그 말씀이 뭐였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곱단 : 별 말 아니에요. 내가 그랬어. 그 오두막집에 처음 들어간 날 그이한테. 어린 나이에 갑자기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사람이란 건 참 신기해요. 나이하고 별로 상관이 없어. 그래서 내가 청년을 선생님이라고도 부르는 거에요. 그래요, 뭐라 그랬냐면... 별 말이 아니에요. 두 손을 꼭 맞잡고서 그냥 그랬지요. 나는 당신 이름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누구이든 좋습니다. 그저 좋습니다.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김곱단 할머니가 등을 쓸어주며 토닥인다. 말 그대로 별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빈틈에 엎드려 충분히 울게 된다. 울면서 생각한다. 내 삶은 아름다웠는가. 행복했는가. 내가 누군가에게 한 마디 말로 남아 있을까. 




2013. 10. 2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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