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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1

멀고느린구름 2013. 9. 19. 07:45


분홍저고리. 박창돈



61년 




인터뷰


   61년 전에 한 남자애를 만났고 마음에 품었지요.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3년 간 동거를 하던 연인과 이별하고 다니던 잡지사에 장기 휴가서를 내고 2주 째 집에 틀어박혀 있던 때였다. 부장은 최후 통첩을 했다. 이번 인터뷰를 따오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것이었다. 퇴직 당한다고 해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매일 매일 무작정 버스를 타고 처음 보는 동네에 내려 배회하다가 동네 약국에 들러 수면제를 사오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수면제는 제법 치사량에 가깝게 모여 있던 참이었다. 부장은 내 의사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메일로 인터뷰이의 신상 명세서를 보내왔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가득한 노파의 사진을 보자마자 다음 내용은 읽지도 않고 컴퓨터를 꺼버렸었다. 자야 부인 정도 되면 또 몰라. 발행하면 500부도 채 팔리지 않는 잡지를 발간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만을 다루는 허접한 잡지라고 늘 생각해오던 것을 내가 만들 게 될 줄은 몰랐지. 덕분에 나의 인생도 시시껄렁해지고 말았다. 전쟁이라도 났으면 싶었다. 막상 혼자 죽으려니까 억울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웬만하면 받지 않았었다. 하지만 헤어진 다음부터는 자꾸만 기대를 품게 되어, 번번이 대출상담과 최신형 스마트폰 구매 건에 대한 안내를 받게 되었다. 그날 걸려온 전화는 집요함이 남달랐다. 10분 동안 동일한 번호로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혹시? 10분 1초가 되자 먹던 컵라면을 내려놓은 채 뛰어가 소파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제기랄. 그녀가 아니었다. 아니, 그녀는 맞았다. 웬 이 빠진 노파의 불경 외는 소리 같은 말들이 휴대폰 저편에서 들려왔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냥 끊어버리려고 했다. 그때 저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흐느낌은 이내 목놓아 우는 읍소로 점차 바뀌어갔다. 당황스러웠다. 노파도 저렇게 울 수 있었단 말인가. 울음 소리는 신비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한 노인으로 느껴졌던 목소리였는데, 울음 소리만은 가녀린 소녀의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노파는 쉬이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할머니, 진정하세요. 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난처했다. 누군가 내 인간성의 마지노선을 시험하려는 것일까. 수 분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노파의 울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만나 줄 거죠?

네?!

선생님, 저 인터뷰해 줄 거죠? 


  그제서야 저편의 상대가 신상 명세서의 노파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어딘가 노파의 목소리가 젊어진 느낌. 아니, 거의 조금 전 울음 소리처럼 소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호기심이 일었다. 노파와 인터뷰를 진행할 날짜를 잡았다. 장소는 노파의 집으로 결정했다. 노파는 전화를 끊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까르르 웃었다. 한참 동안이나 휴대폰의 ‘통화 종료’ 라는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뒤에는 마지막 인터뷰라고 생각하자고 마음 먹었다. 약속한 걸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약속한 날짜, 약속한 시간, 약속한 장소에서 나는 녹음기를 들고 노파와 마주 앉았다. 노파는 수정과를 내왔다. 노파의 집은 사랑방과 안방 한 칸씩에 부엌과 소담한 정원이 딸린 조그만 한옥이었다. 정원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녹음이 잘 될지 걱정이었다. 골동품 같은 선풍기도 팔팔거리며 돌고 있었다. 구름이 한 점도 없었다. 노파는 연분홍빛 개량 한복을 차려 입고, 쪽지어 올린 백발을 옥비녀로 단정하게 고정시켜 놓았다. 젋었을 적의 모습이 절로 궁금해졌다. 녹음 버튼을 눌렀다.  





2013. 9. 1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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