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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저녁, 라벤더 차를 마시며

                                   장명진



주전자씨

왜 그리움을 끓이면 한숨만 나요

라벤더 한 잎 추억에 휘휘 저어

열뜬 물 위에 띄우면 마스카라 번지듯

못다 핀 꽃이 소르르 풀리고

수심 재러간 오롯한 라벤더 한 잎

귀퉁이에 숨어 모락모락 편지를 피워요

기억나니 떠오르니 생각나니

너도 가끔 지나간 기차를 기다리니

오늘도 자전거로 골목 어귀를 지날 때

나는 보았어요

아닌척 시침떼며 이미 지나가는

새털구름 흔들바람 도랑물 고양이 비닐봉다리 너

소풍 마친 아이들처럼 집으로

우린 함께 돌아갈 순 없어요

사랑 파는 마트에도

반아인슈타인적 상품은 없거든요

페달을 뒤로 밟아도 

잎새는 지거든요

라벤더 차를 마시며 그만 웃고 울어봐요

우리 마지막으로 본 그 영화 

'라벤더 향기'를 위해

주전자씨 

왜 그리움은 식으면 웃음만 나요

혹시 어쩌면 아마도

그리움은 구회말 투아웃의 타자가 아니었나요

패자부활전 달리기의 푸른신호가 아니었나요



마지막 저녁, 라벤더 차를 마시며 

나는 가요

더는 보고픈 게 없어요


2003. 11. 1.




* 저 시절의 나는 정말 우울했구나 싶다.. 가련한 것. 그래도 힘내서 이만큼 살아왔으니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보고픈 것이 있는 한... 사람은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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