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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내 문학의 베이스 캠프를 접으며

멀고느린구름 2013. 1. 15. 23:15



   결국 작년 한 해 정식 문예지를 통한 공모전은 모두 탈락했다. - 자음과 모음 신인상 발표가 이미 11월 24일에 책을 통해서 나왔음에도 나는 인터넷 검색만하고서 아직 발표가 안 될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 이전에는 간간히 최종심에도 오르곤 했던 나의 소설이었지만... 2012년 한 해 동안은 단 한 작품도 최종심은 커녕 예심의 문제작 반열에도 오르지 못했다. 작가적 재능이 다했거나 시대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거나 둘 중의 한 결론 밖에 내릴 수 없는 참담한 결과다. 물론 어느 쪽의 결론도 타당한 결론은 아닌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뭐였을까. 답은 역시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글에서 언제부터인가 치열함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면피용으로 소설을 쓰고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고,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근 몇 년간 쉬지 않고 소설을 써온 것이 아닐까. 그 작업 속에는 작가적 치열함도 삶과 세상에 대한 뜨거운 물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쓰다보면 누가 알아주겠거니, 이렇게 꾸준히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거라고 위안을 삼아온 것이었다. 


  공모전에 보낼 때는 일부러 퇴고를 하지 않은 초벌 수준의 작품을 그대로 보내왔다. 솔직히 고백하자. 나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진정을 다해 쓴 작품이 거부 당하는 것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선택받지 못한다면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소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노력을 회피해왔다. 


  옛 적에 그래도 제법 변변한 문학상을 받았던 내 소설을 떠올려보면 무척 치열하게 쓴 것들이었다.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단편 <타인의 세상>은 3개월을 쓰고, 6개월을 퇴고했다. 고대문화상을 받았던 <잃어버린 사랑을 찾습니다>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버전만 10여개가 넘는다. 손으로 쓴 원고에 붉은 색으로 고쳐 쓴 흔적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이후 몇 번의 공모전 탈락 이후 나는 제대로 소설을 쓰지 않았다. 이전의 열정만큼 마음을 다해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는 뻔뻔하게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작년 한 해 내 작품들이 보내졌던 7개의 공모전. 1998년의 일이 떠올랐다. 1998년에 나는 일곱편의 소설을 써서 7곳의 공모전 및 백일장에 출품했고, 모두 낙방했다. 그리고 1999년에 <타인의 세상>을 써서 청소년문학상을 받았고, 그 한 번의 수상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 상이 아니었으면 나는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어쩌면 대학생이 될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내 주변의 삶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고, 내 삶의 질도 아마 한 없이 낮은 곳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해본다. 한 사람의 생에서는 그리 많은 기적이 주어지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이미 나는 수차례의 기적을 맛본 사람인 것이다. 여기까지일까. 더 이상 올라설 수는 없는 것일까. 묻게 된다... 


  하지만, 써야 한다는... 그리고 쓸 수 있다는 내 운명을 믿는다. 지난 내 인생의 모든 순간에서.. 내가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을 것임을 안다. 내게서 소설을 빼앗아 가면 순식간에 나는 무척이나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한다는 사실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소설 쓰기는 내 반성의 도구이자 진보의 나침반이 되어 왔다. 그러므로 계속 쓸 것이고 써야할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지난 날과 같이 건성으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치열한 물음으로, 좀 더 낮고 무거운 자세로 써야함을 알겠다.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작가로서 행세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제도에 여러 부정적인 요소들이 많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등단'이란 절차가 같는 작가 지망생 개개인의 고양의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다양성이 희생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한편, 다양성 속으로 숨어들려는 나태함을 질타하는 면도 클 것이다. 내가 쓰려는 소설은 아마도 '다양함'의 카테고리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더욱 이 산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산이 아무리 높아보여도 걸어오르면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사람의 발이 땅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눈보라와 추위 앞에서 나는 수년 째 망설이고 있다. 베이스 캠프에 앉아 조그만 창으로 눈 덮인 정상을 올려다본다. 이제 캠프를 접는다. 올라가야 할 때다. 얼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올라가보겠다. 



2013. 1. 1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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