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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녹차, 신경숙, 유키 구라모토

멀고느린구름 2012. 2. 8. 15:19



* 영하 두 자리 수 아래까지 떨어졌던 기온이 한 자리로 다시 오르고 있습니다. 베란다에 전 세입자가 걸어두었던 낡은 블라인드를 떼어내고 나니 햇살이 와락 밀려듭니다. 거실 겸 책방에 놓인 하얀 소파에 앉아 있으니 봄이 온 것만 같습니다.

햇살은 이리도 따뜻한데 며칠 전부터 마음은 허허롭기 그지 없습니다.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은 이리 굴러갔다 저리 굴러갔다 합니다. 왜 이런가 궁리를 해보지만 답이 안 나옵니다. 그저 계절 탓이려니 해버리고 맙니다.

점심을 조촐하게 차려 먹고 오랜만에 차를 준비합니다. 스누피가 그려진 스테인리스 포트에 물을 끓이고 오래전 한 스님께 선물로 받은 다기를 티테이블로 쓰는 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차 주전자에 끓인 물을 따르고 기다렸다 차 그릇에 옮겨 받았습니다. 햇빛이 반짝이는 초록빛 강물을 옳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찻잔에 조심스레 따라 한 잔씩 마시며 책을 읽습니다.

집안이 너무 적막해 종일 음악을 틀어놓습니다. 이번에는 유키 구라모토상의 차례입니다. 그의 피아노 소리는 물결 소리를 닮아 좋아합니다.

초봄 시냇물 가에 나온 것 같았습니다. 어릴 적의 저는 숲과 강을 좋아했습니다. 혼자서 숲 속 나무그늘에 앉아 구름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낙동강 물결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신경숙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2006년이었나. 그때 외딴방을 읽은 것이 아마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는 젋고 재미있고, 간결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끌려 신경숙 작가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제는 몸 속의 모든 세포가 비어버린 것만 같고, 사람의 말이란 것이 어쩌면 참 부질없다 싶어져서 그녀의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할 말을 잃게 되는 순간 어쩐지 읽고 싶어집니다. 

'종소리'를 읽었습니다. 읽기를 잘했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녹차를 마시며,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을 들으며, '우물을 들여다보다'를 읽었습니다. 역시 읽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때로 사람의 말은 그 자체가 지닌 미묘한 설득력과 논리성으로 인해 사람을 할퀴곤 하는 것 같습니다. 본디 말이란 비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채우기 위해 있는 것이라 그 자체가 태생적인 욕심을 품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위로가 되는 순간. 말 이외의 것이 위로가 되는 날. 

오늘이 그런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년의 강물을 닮은 한 잔의 따뜻한 녹차가, 유키 구라모토상이 하나 하나 짚어낸 건반의 소리가, 무엇을 전달하려고 강요하지 않는 신경숙 작가의 이야기가 위로가 됩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혹 너무 많은 말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돌이켜봅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당신의 어디가 그리도 아픈지에 대한 말들을 요구해왔습니다. 허나 어쩌면 그것은 시험 문제를 푸는 방식이었지, 당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모두가 간편하게 무엇이든 얻으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진리도, 사랑도, 성공도. 모두가 지름길만을 찾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느리지만 내가 걷는 길의 보도블럭 모양이며, 주변에 심어진 나무며, 바람의 감촉이며를 다 느끼고 가는 길을 가겠습니다. 

녹차가 참 맛있습니다. 이 속에 고조곤한 이야기와 흐르는 피아노 선율과 아직 오지 않은 봄이 죄 담겨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차를 다 마시고 산책이라도 나가야겠습니다. 


2012. 2. 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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