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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각은 11:00 때는 2012년 12월 31일이다. 나는 동해 바다로 해를 보러 떠나는 대신 두 편의 글을 기획하고 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한 글이고 하나는 ‘나’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두 편의 글은 서로 연관을 맺을 지도 모르겠다. 먼저 쓰는 쪽은 ‘세상’에 대한 글이다. 마야 족의 예언에 따라 세상이 아직 멸망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의 차원에서 먼저 쓰는 것이라고 해두자. 물론 사실은 아니다. 



웰빙, 힐링, 그리고 우리가 탐닉하고자 하는 것 




우주가 갑자기 인플레이션으로 확장되고 빅뱅을 일으켜 지금 크기의 우주가 된지 137.5억년 가량이 되었고, 유럽에서는 한류 가수 중 ‘빅뱅’의 선호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세상은 어쩌다보니 만들어졌고, 창조론에 의하면 신의 의지에 의해 생겨났다고 한다. 어느 쪽도 사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존재의 당위성을 완벽하게 증빙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만들어졌 건 간에 세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유기체적인 존재로서든, 신의 피조물로서든 어찌되었든 간에 살아가고 있다. 


원시 시대를 지나 돌맹이를 다룰 줄 알게 되었고, 사실 철기 보다 복잡한 청동기 시절을 지나 철기를 거치고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게 일반적인 역사의 흐름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 기술법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는 전혀 무관하게 시간을 처음과 끝이 있는 2차원적인 선으로 보는 방식이다. 과학에서 밝혀낸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를 처음과 끝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사람의 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갖고 있다.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 


적어도 대단히 위대하지 않은 인간이 사유하는 ‘세상’이란 결국 자기의 목숨이 붙어 있는 공간으로서의 세상일 것이다. 선조의 유지와 후세의 고난까지 공시적으로 사유하며 살아가는 서민이란 조금 카테고리에서 어긋나 보이지 않는가. 


가장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수명만큼의 한 시절을 살다갈 뿐이다. 딱 그만큼의 시공이 그에게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제한된 그 시공 속에서 인간은 각자의 ‘꿈’을 추구해나간다. 허나 그 꿈은 번번이 ‘시대’ 혹은 ‘세상’이라는 이름 앞에 좌절된다. 그럴 때면 저항이 일어나고, 때때로 시대나 세상이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음 세대가 되면 이전의 세대가 바꾸어 놓았던 세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역시 저항을 하고 또 때때로 세상은 변화한다. 


혁명, 역사 이런 말들은 그 말의 무게감 탓에 사람의 생에서 더 중요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기실 그 본질에 있어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패션 아이템이 바뀌는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 정신’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한 시대의 유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인간의 정신은 무기한 후세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살고 있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미 모두가 예수나 부처가 되었을 것이다. 


21세기가 된 이후의 대한민국을 보면 일련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정치 지형의 변화는 사실 언론이나 호사가들이 강변하는 것처럼 우리네 삶을 흔들어 놓을 대단한 변화는 없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늘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며 이쪽으로 기울었다 저쪽으로 기울었다를 반복했다. 


사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유의 변화였다.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하는 부분에서 21세기의 한국은 적극적인 사회에서 소극적인 사회로 급변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21세기 초 한국을 지배했던 다음의 두 키워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웰빙과 힐링이다. 


웰빙은 국민의 정부 말, 그리고 참여정부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미국 중산층에서 60년대 히피문화를 추억하며 만들어낸 미국발 웰빙 문화는 한국에 상륙하면서 몸보신 문화로 급변했고 온갖 상업적 아이템을 창출해내는 귀중한 블루오션이 되어주었다. 금발의 남성들이 삭발을 한 채 유행처럼 선에 심취하고, 미국 여성들은 동양의 음악과 패션에 주목했다. 서양인들은 거대해지는 중국을 여행하기 시작했고,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 그리고 호치민과 모택동에 이끌렸다. 그러는 와중에 한국은 채식주의와 건강음식, 비타민, 몸짱, 얼짱 붐에 시달렸다. 


과도하게 몸에 집중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2000년대 중반 즈음이 되어서는 극심한 피로감에 신음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더 이상 무언가를 마음 놓고 향유하거나 소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텅빈 영혼과 머리를 채워줄 멘토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찾아다니는 일마저 귀찮아지자 누가 좀 찾아와서 자신들을 치유해주기를 기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 바 힐링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2012년 대선은 한국사회 민중들의 힐링의 욕망이 극에 달한 결과였다. 민중들은 스스로를 치유하기 보다 치유해줄 영웅을 갈망했고, 갑작스레 나타난 힐링의 아이콘 안철수에게 기대를 걸고, 또 다른 힐링의 주체 문재인을 연호했으나 51.6%의 또 다른 민중이 박근혜에게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걸고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전개가 이어질지는 속단할 수는 없으나 결과적으로 51.6%이든 48%이든 어느 쪽도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기대했던 힐링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한 기대는 신에게 하는 것이지 똑같은 인간에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 박근혜는 민중을 구원할 수 없다. 물론 문재인도 안철수도 마찬가지이다. 


웰빙 열풍에서 온 피로도가 힐링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힐링 받지 못했고 아마도 곧 엄청난 열패감에 시달리게 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또 다시 정치권이나 외부 환경의 탓으로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규정하려 한다면 앞으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국사회는 아무리 대단한 위인이나 영웅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현재 자발적인 변화의 역량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변화에 대한 의지가 없으며, 더 문제 시 되는 것은 방향이 없다. 


20세기의 세계가 결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 과정이었다면, 21세기 초는 그 외피를 바꾸어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안 드림의 대결이 될 예정이었다. 허나 아메리칸 드림은 예상보다 급속하게 퇴조하고 있으며 그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알아차리고도 외면하는 한국과 같은 신흥 개발도상국에서만 세계관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오바마 이후 유러피안 드림으로 세계관을 상당 부분 이양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이 세계의 대안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을 조심해야 하고, 일본을 인류의 디스토피아로서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일본은 맹목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좇았던 아시아가 도달한 최종 지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귀결은 심각한 생태계 교란, 극우에 다가가는 민족주의, 사회 정체, 정치 외면 현상, 자폐적 개인의 확대 등등의 현상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정확히 일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까.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정치 개혁을 부르짖고, 상대진영을 성토하는 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힐링의 실패에서 온 열패감을 상대에 대한 적의로 변화시킬 때 일어나는 결과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전쟁이다. 1945년 갑작스런 해방정국 속에서 우리는 억눌렸던 힐링의 욕망에 들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좌절되었고, 힐링의 좌절을 가져온 상대에 대한 적의는 6.25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는 ‘세상’이 진보한다고 믿지 않는다. 세상은 그저 유행처럼 순환할 뿐이다. 다만 진보하는 것은 인간이다. 윤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기가 주어진 수명 속에서 인간은 최대한 진보할 것이고, 윤회를 받아들인다면 억겁년의 세월 동안 인간은 차츰 차츰 나아갈 것이다. 요즘은 ‘진보’가 정치적으로 좌파를 지칭하는 말처럼 되었지만 그 원의를 살린다면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보완해가며 성장해간다는 의미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진보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고 끊임없이 자기 삶에서 보다 나은 경지를 추구하고자 한다. 혹자는 이를 일컬어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산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반드시 ‘행복’이라는 상태를 추구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 속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도전하려 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기질성이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생물학적 기질성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기질성이다. 생물학적 기질성은 생명체를 유지하고자 하는 생물학적인 본능이고 이쪽이 성한 인간은 보수적 경향성을 띤다. 반면 영적인 기질성은 근원적으로 성장하고 진보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유목적인 특성이 있다. 이쪽은 물론 진보적 경향성을 띤다. 세상이란 이 두 가지 기질성이 서로 이렇게 저렇게 범벅이 된 사람들이 뒤엉켜 구성되고 때에 따라, 혹은 우주의 기운에 따라 이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저쪽으로 기울기도 하는 것이다. 


전쟁과 독재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는 생물학적 기질성이 성한 구성원들의 비중이 높아졌다. 사회가 안정된 이후 출생한 세대는 그에 비해 숫자도 적을 뿐더러 이후 세대에 의해 생물학적 기절성을 더욱 발현하도록 학습된 탓에 영적인 기질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소홀하다. 그런 탓에 한국사회는 서구 사회의 웰빙과 힐링이라는 키워드를 받아들이면서도 서구와는 다르게 생물학적 부분에 초첨을 맞추어서 누가누가 오래 젊게 사는가 하는 경쟁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영적인 기질성이 진정 그 자신들의 자발적인 요구와 노력에 의해 회복되지 않는 한 안철수 할아버지가 나와도 한국 사회는 변화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위대한 힐링장군의 군사 쿠데타를 기대하는 게 빠를 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나치게 타율성에 젖어버렸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책무와 몫을 고민하는 자세를 잃고 말았다. 21세기 초 웰빙 열풍과 힐링 열풍에서 그 핵심을 꿰뚫고 긍정적인 노력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없다. 단, 한 가지는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서태지가 이미 2000년 초입에 선언하지 않았나. 영웅이란 존재는 더는 없다. 우리 개개인이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구호를 외쳐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영웅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먼저 치료하는 일이다. 더 이상 누구에게 의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개개인이 자신의 멘토가 되고 의사가 되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놓친 진정한 웰빙의 의미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참된 삶이 무엇인지 각자가 각자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 다음에서야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의 교육이 가지는 역할이 크다.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아이들에게 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미리 답을 보여주는 것도 안 된다. 케케묵은 성공학 개론서 따위는 창고에 쳐넣는 것이 좋다. 자기 인생의 답 정도는 자기 스스로 내놓을 줄 아는 인간이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어른에게 의지하고 멘토에게 답을 요구하고 기성세대의 책임을 묻기만 하는 청춘들을 양산한 후의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힐링 열풍에 편승해 청춘들의 멘토를 자처하는 많은 인물들의 출현을 우리는 이미 목도한 바 있다. 그 중에는 썩 훌륭한 멘토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진정 필요한 것은 원로도 멘토도 아니었다.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멘토의 다정함은 자발적 사유의 싹을 잘라버리고 수많은 맹목적 팔로워들만을 양산할 따름이다. 그 수많은 팔로워들의 힐링욕이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었는가...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그 본질에서는 실패한 무대 위에 서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깨달음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 탐닉해야 할 것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2012. 12. 31. 23:5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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