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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플랜 B의 삶

멀고느린구름 2020. 1. 3. 07:50

플랜 A의 삶은 20대에 천재 작가가 나타났다는 찬사를 받으며 혜성 같이 문학계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준수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는 한편, 싱송라로도 데뷔하여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에도 올라보는 게 나의 꿈이었다. 또 운명의 연인과 20대에 일찍 결혼하여 함께 서로와 세상을 밝히는 동반자로 살아가겠다는 게 중딩 시절부터 이상적으로 그리던 플랜 A의 미래였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등장했던 GOP 위에서 20대의 끝을 맞이했으나 내 삶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삶을 드라마로 만들기에 20대의 나는 너무 어리석었다. 

 

30대에도 플랜 A로의 희망고문은 이어졌다. 조금 늦어졌을 뿐 플랜 A의 삶은 언제라도 다시 시작되리라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봤다는 점괘를 무의식 속에서 붙잡고 있기도 했다. 점괘에 따르면 내 인생은 38세가 되어서야 풀리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점괘는 맞지 않았다. 30대의 나는 20대의 나보다 조금 덜 어리석었으나, 여전히 어리석기는 매 한 가지였다. 한 때 플랜 A의 이상에 근접해보았지만, 곧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10년의 출발선이 되는 해를 맞으며, 나는 플랜 A를 이제 놓아주기로 했다. 과거의 영광, 이미 늦어버린 지난 날의 이상적 계획들에 집착하다보니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종종 망각하는 과거 회고적 인간형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는 늘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만다. 

 

천재 신인의 등장이라는 찬사를 받을 공모전의 운이 다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내 길을 만들어 가자고 생각한다. 기적적인 반전을 갈망하기 보다, 작은 계획과 실천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올해는 가능한 네 권의 책을 만들고 싶다. 1-2월 중에는 <오리의 여행 2 - 기억해주세요, 나의 이름을>을 드디어 발간할 것이다. 늦봄 또는 여름에는 첫 소설책을 낼 예정이다. <소희>라는 이름으로 연재했던 연작소설을 제목을 <연. 희>로 바꾸어 묶으려고 한다. 가을에는 지금까지 꾸준히 매진해왔던 인테리어 작업들을 엮어서 인테리어 에세이 책을 낼 생각이다. 겨울에는 가능하다면 파리를 여행했던 기억을 담아 여행소설을 써내고 싶다. 이렇게 힘을 짜내어 네 권의 책을 내고, 앞으로 해마다 한 권의 소설, 한 권의 논픽션 책을 꾸준히 발간해 10년 뒤에는 스무 권 정도의 책이 내 이름과 내 출판사 '페이퍼클라우드'의 이름을 새긴 채 내 책장에 꽂혀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과욕을 부리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남과 비교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뚜벅뚜벅 앞으로. 내 보폭으로. 

부디 그것이 플랜 B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기를 바란다.  

 

2020. 1. 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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