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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구성주의 교육과 인디언 티칭 


자기주도적 학습법과 더불어 핀란드 교육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사회적 구성주의' 교육이론이다. 러시아의 교육학자 비고츠키에 의해 주창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이 교육이론은 학습이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교육이론은 한 개인에게는 학습해야할 단계적인 지식이 있고, 개인이 특정한 지식을 갖춘 교수에게 레벨 1부터 9까지 순차적으로 학습해야 한다는 종래의 교육과정을 부정한다. 지식의 습득에는 근본적으로 단계가 없으며, 학습방법 또한 개별 교수에게 사사받는 방식보다는 공동체 속에서 서로 모르는 것을 문답해가며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보는 것이 '사회적 구성주의' 이론의 시각이다. 


핀란드 교육시스템은 이 시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교육 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모든 학습에 있어서 아이들간의 상호 토론을 장려하고, 아이들의 질문에 대해 교사가 즉답하지 않고, 그것을 알고 있는 다른 아이에게 답을 구하게 하는 것이다. 가능한 다양한 답들이 나오게 도출하고, 교사는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다. 교사가 정답을 제시할 경우, 아이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묻고 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서로 묻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지식이라는 것은 서로 협력할 수록 커지고, 함께 머리를 맞댈 수록 좀 더 올바른 방향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아메리카원주민들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하게 된 이후 학교를 세우고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호피족을 가르치게 되었다. 시험 날이 되어 시험지를 나눠주고 문제를 풀게 하는데, 갑자기 호피족 아이들은 서로 책상을 맞대고 둘러 앉아 함께 시험지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담당 교사는 화가나서 호피족 아이들을 야만인이라고 야단쳤다. 그러자 호피족 아이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함께 해결하는 것이라고 우리 부족은 배워 왔습니다."


나는 이 일화를 핀란드교육 붐이 일기 이전부터 즐겨 소개해왔고, 내 나름대로 저 호피족의 교육 철학을 교육현장에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내가 '인디언 티칭'이라고 이름 붙인 이 교육법은 내가 담당하는 파주자유학교의 수업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수업시간이든 수업 외 시간이든 물어오는 질문에 대해 다른 아이 중 누군가가 알고 있을 법한 것에 대해서는 즉답을 해주지 않는다.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도록 가능한 유도하고, 나중에 아이가 그에 대한 답을 얻어냈는지 확인한다. 수업 시간이라면 곧바로 토론에 붙인다. 무엇이 더 옳은 답안일지 아이들끼리 이야기를 해보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개인의 학습 정도를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가 아니라면 시험시간이라도 다른 친구에게 물어볼 친구 찬스를 주거나, 책을 살펴볼 찬스를 일정한 회수를 두고 부여해주고 있다. 


사회적 구성주의 교육이론이든 나의 인디언 티칭이든, 이러한 교육 방식은 평생학습과 자기주도적 학습과의 긴밀한 연계성을 지니며 상호보완관계를 통해 서로를 강화한다. 토론과 지적 교류를 통한 꾸준한 학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배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보편적인 학습법이었다. 되려 한 명의 교사가 교단에 우뚝 서서 수 십명의 아이들에게 하나의 보편지식을 주입하고 엄격하게 지식의 기억 유무를 검열하는 방식은 산업혁명 이후에서야 세계사에 등장한 낯선 학습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법은 이미 그것이 시작된 서구사회에서는 일찍이 수명을 다했다. 


독재를 경험하고, 경제발전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내달려야 했던 개발도상국들은 서구사회에서 이미 폐기된 교육법을 적극 수입해 지금까지 밀어붙여 오고 있다. 서구의 모델을 모방해 단기간에 그들을 따라잡는 데에는 유효했던 교육법이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모방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만 하는 국가 반열에 이르러 있지 않은가. 


주입식 교육은 창조성의 한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도 사실상 그 적나라한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의 계층간, 종파간, 정치성향간, 세대간 사회 분열 현상은 오직 정답이라고 강요된 것만을 학습하고, 자기가 배운 것이 정답이라고만 믿는 교육을 받아왔던 시민들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애초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법이나 지식을 나누는 법을 학습해오지 않았고, 다른 정답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이성 속에서 밀어내며 지내온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스타트 신호 


인터넷의 발달로 더 이상 한 개인이 백과사전을 암기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상당히 전문성 있는 지식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수 분만에 획득할 수 있다. 이제 한 개인의 놀라운 기억력이 각광 받던 시대는 저물었다. 새로운 사회는 한 개인이 가진 지식과 다른 사람의 지식이 결합해 어떤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 되는 사회다. 이른바 요즘 학계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통섭과 융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학문간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서구사회는 역시 이 새로운 시대담론을 리드하고 있다. 그에 반해 학문간 벽이 높고, 자기 학문만이 정답이고 최고라고 여기는 풍토가 있던 우리나라는 여기저기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여전히 세계의 변방국으로 세계사의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주어진 조건대로 이끌려 가고 말 것이다.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인재가 요구되며, 그러한 인재를 길러낼 새로운 교육이 시급하다. 하지만 교육 당국은 관성과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하며, 모처럼 현실의 문제점을 캐치해냈다고 해도 비대해진 체계 탓에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100여개의 대안학교들은 말 그대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안교육 = 핀란드 교육'이라는 등식은 당연히 성립되지 않는다. 허나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바람직한 교육'이라는 대의를 향해 공교육 시스템보다 훨씬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공통점이다. 물론, 한국의 대안교육은 사실상 현재 침체기에 이르러 있다. 열정은 유효하나 경제적, 제도적인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다. 교육당국은 10여년이 넘는 대안교육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안학교'라는 명칭조차 인정치 않고 있는 상황이니, 대안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은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안교육은 서로의 성과와 축적된 지식을 공유하며 상호 발전해가고 있다고 본다. 최근의 '혁신학교'가 사실상 대안교육의 성과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핀란드 교육 열풍 덕택에 새로운 시대를 위한 교육 담론이 촉발되고 있는 것은 무척 반가운 현상이다. 그 담론의 한 자락에 지난 몇 십년간 일구어온 대안교육의 성과와 역사가 함께 자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몇 달에 걸쳐 이 글을 연재했다. 그간의 노력에 비해 요즘 대안학교가 사회 전체의 경제적 어려움과 맞물려 일부 시민들에게 '귀족학교'로 오인받는 수준으로까지 그 사회적 지위가 퇴락한 것은 씁쓸한 일이다. 귀족학교라고 오인받게 되는 대안학교의 비교적 높은 교육비는 대안학교들 자체의 문제점이라고 보기보다는 10여년이 넘게 아무런 교육적 지원을 하지 않고 있는 정부의 문제점이라고 보아야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대안교육이 국내에서 태동된 시점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대안학교에 몸담고 있는 교육자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핀란드 교육 열풍에 기대어 우리나라의 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함께 제안해보았다. 제안자체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 이제 문제는 제안한 것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교육현장에서 실현하고, 문제들을 주어진 환경 하에서 조정해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지난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과정이 되리라. 허나 우리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으며, 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교육적 과제들을 비교적 선명하게 알고 있다. 실천의 문제만이 남았다. 누가 스타트 신호를 쏠 것인가. 방아쇠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역시 대안학교들일 것이다. 아니, 이미 스타트 신호는 쏘아졌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신호를 들었고, 누군가는 듣지 못했을 뿐. 



* 추신 : 그동안 꾸준히 글을 읽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


2013. 6. 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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