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인사 사랑이라 부른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5월의 저녁을 적시던 소나기와불러보면 노래와 같던 너의 이름외로움 앞에 의연하던 북한산 정상의 바위와어느 오후 졸음으로 지나쳤던 차창밖의 풍경들달리던 자전거를 멈춰세우던 아기 고양이와연인이 생기면 들려주자던 봄의 노래들떨어지던 붉은 페이지들잊히지 않는 만월의 바다눈꽃 사이를 헤매다니던 긴 옷자락들우리가 처음으로 맞잡았던 손의 온기와헤어진 뒤면 찾아오던 백야의 날들을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되돌아 오는 것은 마음그래서 안녕과 안녕은 같은 말일까너를 떠올릴 때마다 쉬이 내뱉던 작별의 인사이제는 안녕하지만 사랑이라 부를 것들 이리 많아서야쓴 커피와 즐거운 사람들 유려한 음악그 사이사이에 앉은 수많은 너어쩌면 끝내 끝나지 않을 인사아무튼 안녕. 2012. 11..
동해기행 가버린 것은 세월만이 아니었다 내가 여행을 떠났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영영 오지 않을 것들이 집의 주인이 되었다 여행지의 밤 하늘엔 별 대신 무수한 이야기들이 총총히 켜져 잠을 쫓았다 나를 채우고 있던 바다가 한꺼번에 세상으로 밀려나가는 꿈을 꾸었다 어느덧 수평선 위였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성성히 흩날리는 눈발을 보고 싶었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박제된 추억을 손아귀에 힘껏 그러쥐고 싶었다 눈은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일기를 쓰는 날만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상처를 그 위에 기록했다 죄 많은 나는 상처를 쓰다가 지우곤 했다 사랑한 기억들이 유행한 노래처럼 또렷했다 너를 바라볼 때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낡은 모텔의 거울 앞에서 엔돌핀을 만든..
그리운 친구에게 오늘 내 집 주소를 모른다던 너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 마음의 주소로 편지가 왔다 지금도 여긴 앞의 길은 멀고 등이 푸른 젊음은 슬렁슬렁 가고 있고 너는 그 멀고 그리운 길가에 서서 전화를 걸려다 동전을 갈마쥐어보며 앞 뒤 모두 푸른 등이라고 피식 울지도 몰라 예전에 달넘이 무렵이면 아무 일도 없는 스무 살 하루하루에 지쳐 진전 없는 서로의 풋사랑 얘기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까닭 없이 기쁜 걸음으로 돌아오던 기숙사 그 벤치에 늘어진 젊음처럼 누워 무성히 자란 나무의 까아만 이파리들과 우리네 시간보다 빛나던 별들을 올려다보았지 그러면 잊고 있던 꿈들이 가슴 속에 반딧불이 마냥 아롱아롱 켜졌더랬는데 새 학기가 다 가도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만 같던 푸른 봄 집 떠나와 주소도 잃고 돌아갈 곳 없..
붉은 숲 길을 걷다 멈추고 보니 숲이 제 속으로 조용히 타들어가는 소리 들린다 오래전 삼킨 불꽃이 목에 걸려 까마귀는 앙앙 운다 밤을 부르는 매미들의 염불이 떨어지는 잎새들 사이를 채우고 야윈 가지들, 가지들 사이로 공백한 하늘이 있다 주인 없는 벤치에 외로 누워 눈 앞의 백지에 모자란 연서를 쓴다 아아 그대여 안녕 그리고 또 안녕 그때 붉은 잎새 한 잎 가슴 위에 내려앉는다 소라 고동을 닮은 잎사귀 가슴에 피가 고인다 천천한 바람이 분다 2011. 10. 12. 멀고느린구름. 금학산에서.
북촌 방향으로 사람들이 걸어가지 않는 길만 걸어가려 했다 그날 저녁은 하늘을 두 개의 분단으로 나누고 달은 이르게 나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름들은 기다란 강이 되어 외로워했고 바람은 가을아 가을아 나직이 읊조리고 있었다 비탈진 길을 더러 오르고 더러 내렸다 아이들이 골목을 내달리는 소리에 맞춰 너를 추억했다 모든 지나간 것들은 북촌 방향에서 꽃을 피우고 가을이 되면 낙엽으로 졌다 오래된 문들은 너를 숨긴 채 침묵했다 배고픈 새들이 너를 감춘 집들 앞에서 낮게 울었다 멀리 남산타워 근처에 우리들은 수줍은 맹세를 써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보러 가지 않았다 도망치기 위해 산 생이었다 만나기 위해 사는 생을 소원했다 심심헌의 기와를 타고 수 십 수 백년을 흘러내렸을 빗물처럼 내 속의 온갖 눈물을 다 쏟..
와온(臥溫)의 저녁 유재영 어린 물살들이 먼바다에 나가 해종일 숭어 새끼들과 놀다 돌아올 시간이 되자 마을 불빛들은 모두 앞다퉈 몰려나와 물 길을 환히 비춰주었다. --------------------------------------------- 전남 순천에 있다는 고장 와온. 그곳에서 기다린다면 오래전 집을 떠난 어머니들도, 형아들도 모두모두 손을 잡고 저녁이 되면 우우 해변가에 모여들 것만 같다. 떠나간 옛사랑도 그러할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그대의 손을 잡고 와온에 가서 다정한 내일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싶어진다. 2011. 7. 13. 멀고느린구름.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도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도 저 바람 한 올기 네게 가닿지 않겠냐 아슴푸레한 기억같이 내 이야기 들리지 않겠냐 곁에 있을 땐 사랑은 별이 되었다가 너 먼먼 소식으로 가마아득하니 내 눈가에 비로소 사랑이 자옥이 쉬러 왔다 밤은 청량한 숨 소리 함께 거닌 바닷가 위 남은 네 발자욱 소리 별이 빛나는 밤 고흐는 귀를 자르고 나는 미리내 흐르르는 소리를 사물사물 찢어 귀뚜라미 입에 대어보며 누구나 상처는 깊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헤아리려는 것은 별을 값보는 일 처럼 슬프고 우스운 일이지만 앙당그러진 눈가에 아롱아롱 방울피리 부는 연정은 별보단 조그만 사랑 고작 네 밤길만을 비추는 사랑 이 사랑 너무 작고 불안해 너는 자꾸 떠나려했을까 별처럼 우주처럼 멀어질까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
그해 겨울 그해 겨울. 바스러진 언 숨이 화톳불 곁 군밤장수의 털신까지 쌓이던 겨울. 하루하루 겨울날은 그리도 추웠다. 자정 넘어 어머니는 눈송이 같은 어머니는 동태처럼 지쳐 돌아왔다. 꺼져 버린 연탄불...... 한숨으로 도독한 지갑 뒤적이더니 번개탄 대신 어머니가 사들고 온 복권 두 장 꿈으로 가는 기차표 두 장. 무명이불 말아 덮고 훌쩍이던 내게, 내 배고픔 속에 어머니의 시린 나날 속에 놓인 쓸쓸한 희망. 천만원만 걸리면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막내 도시락에 두 종류 반찬을 넣을 수도 있다. 아니 그저 그저...... 천원만 걸리면 순대를 사먹을 수 있겠지...... 복권을 긁으며 전 생애로 긁으며 몇 만 시간만에 피식 웃음이 났다. 덧없이 부풀었던 그 작은 꿈 그 바램이 넘친 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