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 눈이 달렸어. 그러니까 남들처럼 얼굴에 눈이 달린 게 아니라 정수리의 검은 머리칼 숲 사이에 비밀의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두 개가 고여 있지. 의사는 어머니에게 자궁향수증후군이라고 했어.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너무 큰 나머지 태어나면서도 어머니의 자궁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눈이 거기에 붙어버린 거라고. 아무래도 좋아. 난 하늘을 보며 걷는 게 무척 좋거든. 하늘은 신기해. 정지해 있는 경우가 없지. 무언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해. 그리고 놀랍도록 아름답지.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라는 시가 유행해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불편하게 목을 뒤로 젖혀야 할 때도 나는 여유롭게 유행에 동참할 수 있었어. 세상에 하늘로 눈이 달린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넌 학교에 갈 수 없다고..
10. 진보와 진화 3 압 : 음..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나 : 물론입니다. 압 : 우선, 미스터 고. 그대의 경제 활동이 내가 하는 운동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 그러나 경제라는 것에 대해 제 소견을 잠깐 말씀 드려도 좋겠습니까? 고 : 뭐 하시던가. 압 : 감사합니다. 미스터 고.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삽니까? 고 : 엥? 압 : 중요한 질문입니다. 대답해주세요. 고 : 그딴 게 뭐 별 게 있나요. 그저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러는 거지 다아. 압 : 정말 훌륭한 답이셨습니다. 오 프리덤. 고 : 엥? 압 : 모든 존재는 잘 먹고 잘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하지만 경제란 무엇입니까. 물론 경제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
어느 날 두 개의 벤치가 어느 날 하나의 벤치가 또 하나의 벤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또 하나의 벤치는 깜짝 놀라 대답조차 못했다. 옆에 있는 벤치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 정확히 93년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미안하지만 잠자고 있지 않으면 대답해줄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벤치가 자는 척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을 자기에는 하늘이 지나치게 파랬고 바람은 겨울의 숨 소리처럼 높고 서늘했다. 또 하나의 벤치는 별 수 없이 오래 묵은 자신의 목소리를 꺼냈다. "무슨 일이니?" "역시 깨어 있었구나. 분명히 93년만이지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게?" "응" "난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어. 93년 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서로 이야기하지 않고 지내는가..
5 결국,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말’이라는 도구가 주어졌지만 ‘말’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믿는다. 믿지 않는다. 사실이다. 거짓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공기의 진동에는 물리학적 실체로서의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정보는 오직 빛 -혹은 입자-를 통해서만 타자에게 전달된다. 포유류를 비롯한 짐승들은 위급한 순간 사용하는 단순한 몇 개의 음성신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빛'을 통해서만 정보를 전달한다. 인지과학자들은 이것에 ‘변연계 공명'이라는 까다로운 말을 붙여 사람들의 이해를 차단했다. 다시 표현하자면 변연계 공명이란 직감을 통한 전달이다. 뇌와 뇌, 눈빛과 눈빛, 마음과 마음 사이의 순간적인 대화이다. 아버지와..
4 아버지가 갑자기 응급 수술실로 들어갔다고 담당 간호사에게 연락 받은 것은 새벽 세 시경이었다. 나는 다음날 발표할 프리젠테이션의 키워드 색깔을 파란색으로 할지 초록색으로 할지 고민 중이었다. 파란색으로 하자니 검은색의 배경에 잘 어울리지 않았고, 초록색으로 하자니 계절과 맞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노란색으로 키워드를 색칠하고 대충 옷을 껴입었다. 집밖으로 나서니 서늘한 북풍이 뺨을 세차게 때렸다. 어느덧 10월이었다. 늦여름의 기운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차를 몰아 급히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1시간이 지나버린 4시 23분이었다. 그 사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다. YTN은 정작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새벽에도 여전히 전세 대란..
2 젊을 때의 아버지는 좀 더 혈기왕성한 사람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에 분개하고, 광주학살에 눈물을 흘렸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낭만적 세계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독재자는 사라졌고, 노동법은 준수되기 시작했다. 함께 싸웠던 몇몇은 민주화 투사의 훈장을 달고 정치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다만 원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곁에는 젊은 투사와 사랑에 빠진 소녀가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의 경리였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지만, 성공한 것은 아버지였다. 내가 태어났고 80년대는 사랑보다 빠르게 사라져 갔다. 현상에서 현실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때만 ‘낭만성'은 획득되었다. ‘낭만성'이라는 꽃은 상상력이 허락되는 백지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낭만적이었으..
세상의 모든 저녁으로 가는 방법 버스 구석 자리에 앉아 귤을 까서 입에 넣고 있을 때였다. 귤빛 노을이 부시게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세상의 모든 저녁으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노을의 조금은 긴 이야기 속에선 시큼한 맛이 났다. 입 안의 귤은 다소 쓸쓸해했다. 버스는 어느 정류장에서도 멈추지 않고 세상의 모든 저녁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높고 차가운 소리만 들려온다. 낮고 따스한 소리는 단단한 유리창에 의해 검문 당한다. 쓸쓸해하는 귤에게 한 자락 위로가 될까하여 지나간 노래들을 흥얼거려 본다. 노래 속에서는 오래전 헤어진 연인이 웃고 있기도 하고, 저주하고 있기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사랑은 즐거운 것이었는지, 저주 받을 죄였는지, 양희은의 노래처럼 쓸쓸한 것이었는지..
우리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인간의 뇌에는 변연계라고 하는 것이 있다. 원시뇌인 파충류의 뇌가 짝짓기, 먹기, 잠자기 등 본능을 담당한다면 변연계는 인간의 직관과 감정을 관장한다. 이 변연계는 인간의 몸에서 세계로 뻗어나가 있는 투명한 안테나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인간의 감정과 생각은 1초에도 빛의 속도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다닌다. 수억 명의 감정과 생각을 우리는 변연계라는 안테나로 늘 수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순간에도. 내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그녀 역시 세계지도를 산 일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말하자면 운명, 인연, 기적 따위의 두 음절 단어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조금 복잡하게 사건을 이해하자면 그 순간 나의 변연계와 그녀의 변연계가 ‘세계지도를 방에 걸어야겠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