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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아버지와 킹콩 5

멀고느린구름 2011. 8. 2. 21:51




5   


  결국,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에게는 ‘말’이라는 도구가 주어졌지만 ‘말’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믿는다. 믿지 않는다. 사실이다. 거짓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공기의 진동에는 물리학적 실체로서의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정보는 오직 빛 -혹은 입자-를 통해서만 타자에게 전달된다. 포유류를 비롯한 짐승들은 위급한 순간 사용하는 단순한 몇 개의 음성신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빛'을 통해서만 정보를 전달한다. 인지과학자들은 이것에 ‘변연계 공명'이라는 까다로운 말을 붙여 사람들의 이해를 차단했다. 다시 표현하자면 변연계 공명이란 직감을 통한 전달이다. 뇌와 뇌, 눈빛과 눈빛, 마음과 마음 사이의 순간적인 대화이다. 

  아버지와 나는 숱한 말들을 나누며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아버지와 나누었던 그 불쾌했던 대화와 나를 화나게 했던 낱말들을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말을 잃었던 때의 기억이라면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내 유년시절에 그 순간만이 존재했던 것마냥 수없이 되풀이하여. 흑백의 불빛이 명멸하는 스크린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아버지의 쓸쓸한 표정과 내 손을 꼭 쥐었던 손아귀의 힘이 떠올리려고만 하면 심지어 지금 이 순간의 일처럼 감각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 내 곁에 있다. 아버지는 지금 내 손을 꼭 쥐고 있다. 나는 다시 흑백의 스크린 앞에 앉아 킹콩의 서글픈 등짝을 바라본다. 그 커다란 외로움이 두런두런 내게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되듣는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프로테스탄트들은 대륙의 원주민을 죽이고, 또 죽이고, 다시 한 번 죽였다. 1억에 달하던 인구는 300년 사이 1백만 명으로 줄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의 묘비에는 “내 평생 인디언 99명을 죽였다. 100명을 채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따위의 묘비명이 새겨졌다. 그나마 남은 대륙의 원주민들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 사이 원주민들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그들이 살았던 대지뿐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그 대지마저 파괴했고, 천지를 뒤엎어 도시를 건설했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금광이 발견되면 그곳은 더 이상 ‘보호구역'이 아니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끝없는 유랑을 떠나야 했다. 그들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갔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원주민들은 역시 미개한 족속들이었으며 알코올 중독자인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몇 백년의 시간이 지나 프로테스탄트의 후예인 미국인들은, 그들 중 양심 있는 미국인들은 버락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양심 있는 미국인들은 자신이 이룩한 혁명에 스스로 감동했다. 버락 오바마는 세계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이슬람 테러집단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작전명은 ‘제로니모 소탕작전'이었다. 제로니모는 대륙의 원주민들이 추앙하던 위대한 추장이었으며, 최후의 최후까지 프로테스탄트로부터 원주민들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싸운 전사였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과 세계와 세계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세계와 세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킹콩은 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앤은 킹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머니는 킹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도무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 먹은 짜장면이 어째서 그토록 맛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나는 오랜시간 동안 그때 아버지와 함께 먹은 짜장면의 맛을 갈구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전국의 그 어떤 내로라 하는 중화요리집도 그런 짜장면 맛을 낼 수는 없었다. 답은 간단했다. 그 시절 어머니가 떠난 후 아버지는 나에게 밥을 해준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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