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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아버지와 킹콩 4

멀고느린구름 2011. 7. 27. 04:42






4



  아버지가 갑자기 응급 수술실로 들어갔다고 담당 간호사에게 연락 받은 것은 새벽 세 시경이었다. 나는 다음날 발표할 프리젠테이션의 키워드 색깔을 파란색으로 할지 초록색으로 할지 고민 중이었다. 파란색으로 하자니 검은색의 배경에 잘 어울리지 않았고, 초록색으로 하자니 계절과 맞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노란색으로 키워드를 색칠하고 대충 옷을 껴입었다. 집밖으로 나서니 서늘한 북풍이 뺨을 세차게 때렸다. 어느덧 10월이었다. 늦여름의 기운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차를 몰아 급히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1시간이 지나버린 4시 23분이었다. 그 사이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다. YTN은 정작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새벽에도 여전히 전세 대란으로 서민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새벽에 뉴스를 주로 시청하는 계층이 서민층이라는 통계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세계는 우리가 명확히 알지 못하는 수많은 비밀의 톱니바퀴들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생각이었다. 다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시점은 못 되었다. 

  응급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간병인이 나를 알아채고는 근심걱정이 만연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내 두 손을 꼭 쥐었다. 50대 후반즈음은 되어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간병인의 두 손아귀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내게 전해주기 위해 천천히 데워두었던 것처럼. 다시 오래전 여름의 끝을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자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좌측 끝의 비상등쪽 출구로 상영실을 나섰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행복의 기운이 가득했다. 어째서인지 우리 부자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아버지는 세상에 더 없이 쓸쓸한 예술 영화를 보았다는 듯이 우수에 젖어 있었고, 나는 떨떠름한 기분에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3자가 배경을 제거하고 우리 부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러 가는 아버지와 그 모든 것을 간파한 아이로 여겼을 것이다. 틀림 없다. 

  영화관을 빠져나와 아버지는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공원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내 손을 쥔 아버지의 손아귀 힘이 점점 더 세어지는 느낌이었다. 손이 아파 올 지경이었지만 그런 불만을 제기할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되어 꾹 참았다. 길을 잃은 여행자처럼 갈팡질팡하던 아버지는 공원 내에 있는 중화요리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외식이라니. 태어난 뒤 기억하고 있는 첫 외식이었다. - 물론 전혀 기억나지 않는 유아기 시절에 밖에서 먹은 적도 있겠지만 -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걸 시켜.”


  아버지는 메뉴판을 내 앞에 내밀며 낯선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어른들이 조심하라는 유괴범들은 반드시 저런 미소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것이리라. 나는 조심스레 메뉴판을 받아들고 아버지의 눈치를 보아가며 가격표를 훑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음식의 이름보다는 가격에 먼저 눈이 간 것이었다. 짜장면을 시켰다. 아버지는 더 맛있는 것을 시키라고 권했다. 다시 짜장면을 시켰다. 아버지는 아쉬워하는 척하며 본인도 짜장면을 시켰다. 짜장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 놓였다. 우리는 말없이 면발을 입에 집어 넣기 시작했다. 음식점 안에는 가족단위로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듬성듬성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아빠. 엄마. 아이. 대부분은 이 완편된 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혹은 다수는 반드시 침묵을 지켰다. 아빠가. 아이가. 엄마가. 혹은 그 모두가. 나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구성원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구성원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사는 세계가 좁으면 밀도가 증가해, 모두가 숨 쉬기가 곤란해지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었다. 구성원의 수가 적은데 세계가 지나치게 넓은 것도 문제였다. 아무튼 신은 세계를 고약하리만치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맛있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흡족해했다. 이제야 생각이 났지만, 그 무렵의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실종 때문에 찾아온 실어증이었다. 아버지는 다정하게 자식의 손을 잡고 영화관따위를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허나 그 무렵의 아버지와 함께 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아버지는 언제나 굳게 내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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