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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아버지와 킹콩 2

멀고느린구름 2011. 7. 15.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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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을 때의 아버지는 좀 더 혈기왕성한 사람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에 분개하고, 광주학살에 눈물을 흘렸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낭만적 세계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독재자는 사라졌고, 노동법은 준수되기 시작했다. 함께 싸웠던 몇몇은 민주화 투사의 훈장을 달고 정치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다만 원래의 장소로 돌아왔다. 곁에는 젊은 투사와 사랑에 빠진 소녀가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의 경리였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지만, 성공한 것은 아버지였다. 내가 태어났고 80년대는 사랑보다 빠르게 사라져 갔다. 


  현상에서 현실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때만 ‘낭만성'은 획득되었다. ‘낭만성'이라는 꽃은 상상력이 허락되는 백지의 정원에서만 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낭만적이었으나, 아버지의 삶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궁핍, 가난, 어둠, 추위, 각박함, 막막함, 벽… 이런 단어들이 그의 삶에 어울렸다. 가능하다면 저 단어들 중 하나는 액자에 넣어 아버지의 삶 어딘가에 걸어두었으면 싶었다. 


  아버지와 킹콩을 보러 간 것은 여덟 살 무렵의 나였다. 그 무렵 어머니는 새벽의 안개와 같이 아버지 앞에서 사라졌다.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젊은 투사와 사랑에 빠진 소녀는 찾을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어머니를 숨기고서는 드러내놓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기가 해야할 일은 묵묵히 해왔다고 생각했다. 돈을 열심히 벌었고, 죽음에 대해 우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생활을 유지시켰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실종을 해석할 수 없었다. 굳게 잠긴 비밀방의 열쇠를 어머니는 가져가 버렸다. 아버지는 공황 속에서 몇 달을 보태야 했다. 아버지는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청년이었고, 세계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그린란드가 지구 동쪽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바이칼 호수로부터 이주한 아시아인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리스 신들의 목록을 꿰고 있었지만, 시칠리아에 지어진 신들의 궁전은 사진으로도 보지 못했었다. 피천득의 책에 쓰여진 ‘스위트피'를 발음해보며 아련해지고는 했지만 스위트피의 촉감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때였다. 

  아버지는 스위트피 대신 붉고 연한 아이의 손을 쥐고 어린이 대공원 인근에 있던 극장으로 향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길을 걸었다. 아무렇게나 지은 슬레이트 집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비좁은 골목길들을 지나자 거대한 4차선 도로가 펼쳐졌으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것은 마치 좁은 성곽의 울타리 속에서 살던 유럽인들이 대서양을 횡단해 아메리카 대륙에 닿은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거대한 하늘로부터 햇볕은 공수부대 마냥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매표소 앞에서 능숙하게 표를 구매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비로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납득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이른 바 ‘사회적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선한 충격이었고, 나 역시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처음으로 가질 수 있었으며, 바로 그 시점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이미 독립했노라고 자평한다. 

  영화가 시작되기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아 있어서 아버지와 나는 동물원에 갔다. 하마가 하품하는 것을 보며 따분하게 하품을 했다. 솜사탕을 먹고 싶어 수 십 차례 눈길을 주었지만 아버지는 알아차리이 못했다. 아침도 먹고 나오지 않아 배가 고팠지만 점심 시간이 아니었기에 아버지는 아직 밥을 먹지 않았다. 대체 아버지는 왜 내 손을 잡고 있는가 의문이었다. 어머니가 어째서 사라졌는가 하는 부분은 점점 명쾌해졌다.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도 없었다. 지루했다. 하마를 따라 하품을 하는 것도 이제 그만 고역이었다. 펭귄을 보고 싶었지만 남극에서 펭귄을 인간이 멋대로 납치해오는 일따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북극곰도 매한가지. 아버지는 날씨가 덥다는 이유로 펭귄쇼가 펼쳐지는 장소로 이동했다. 북극곰이 함께 유괴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서글픈 심정으로 펭귄들의 광대놀음을 지켜보았다. 펭귄들은 힘겹게 발로 축구공을 드리블해서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움직여 다녔다. 누가 펭귄들을 무임금 축구선수로 징발할 권리를 가졌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동안 아버지는 묘하게 펭귄들의 동작 하나 하나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남극으로 갔다는 첩보를 들은 것이었을까. 남극의 빙하 위에 서서 적도 쪽을 바라보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렸다.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추웠다. 매우. 아주. 무척. 

  영화 시간이 다가오자 아버지는 다시 나를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아버지는 내내 말이 없었다. 다만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성인이 된 후에야 그 행동을 해석할 수 있었다. 셜록 홈즈는 범죄자는 사건 현장에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고 말했고, 연애학 개론서는 실연자는 연애 현장에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고 말했다. 과연 나는 연애가 끝나면 범죄자처럼 연애 현장을 다시 찾곤 했었다. 연애 현장 곳곳에 떨어져 있는 비밀스런 사건의 증거들은 연애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유용한 단서가 되었다. 물론 때때로 그 반대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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