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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우리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멀고느린구름 2010. 9. 19. 22:28



우리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인간의 뇌에는 변연계라고 하는 것이 있다. 원시뇌인 파충류의 뇌가 짝짓기, 먹기, 잠자기 등 본능을 담당한다면 변연계는 인간의 직관과 감정을 관장한다. 이 변연계는 인간의 몸에서 세계로 뻗어나가 있는 투명한 안테나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인간의 감정과 생각은 1초에도 빛의 속도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다닌다. 수억 명의 감정과 생각을 우리는 변연계라는 안테나로 늘 수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순간에도. 


  내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그녀 역시 세계지도를 산 일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말하자면 운명, 인연, 기적 따위의 두 음절 단어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조금 복잡하게 사건을 이해하자면 그 순간 나의 변연계와 그녀의 변연계가 ‘세계지도를 방에 걸어야겠어!’라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동시에 떠올렸고 그 두 생각이 변연계 공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이 글은 과학교양 수필 정도가 될 테니 쉽게 가도록 하자. 이를테면 ‘그것은 운명이었다.’같은 식으로.

 

  그것은 운명이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도 나를 좋아했다. 허나 우리 둘 중 누구도 그 사실을 쉬이 발설하지 못한 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이 사건이 발발했다. 그녀는 학교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개봉동에서 살다가 엊그제 내가 사는 제기동으로 이사를 왔다. 생각보다 큰 하숙방이 허전해서 그녀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사서 벽에 장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의 이면에는 장차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여행가가 되겠다는 포부도 담겨 있다. 그녀는 나와 대화를 할 때 ‘한비야는 이랬다는 둥, 한비야가 이렇게 말했다는 둥, 한비야라면 그렇게 선택했을 거라는 둥 한비야를 거의 4대 성인의 반열에 두고 인용하곤 했다. 그런 그녀에게 ‘세계지도'는 기독교인의 성상 또는 성경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녀가 세계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린 때와 거의 같은 때 나는 당시 꽤나 인기 있던 도올 선생의 EBS 강의를 시청하면서 사해문서가 발견된 사해라는 곳을 궁금해 하고 있었다. 강의 속에서는 니그함마디, 파피루스, 가나안, 바빌로니아, 슈라바스띠 등 도무지 그 위치를 짐작키 어려운 이국의 지명들이 계속 나왔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강의가 끝나자마자 저금통을 털어 방문을 나섰다. 인터넷 검색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왠지 종이로 된 거대한 세계지도에 나는 이끌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시공을 가로질러 그녀와 내가 변연계 공명을 일으킨 까닭일 것이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라고 해도 좋을 시각에 ‘제기문구점’을 향해 발을 옮겼다. 우리 둘의 차이라면 그녀는 우신향 병원 옆의 육교를 건너다 육교 위의 까맣고 작은 고양이를 발견하고, 그 고양이에게 소시지를 선물하기 위해 다시 집까지 뛰어 갔다 와서는 고양이가 천사처럼 얌전히 소시지를 오물오물 깨무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넋을 잃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목적지로 오는 길에 엠마 빵집을 들러 딸기 파이를 하나 샀다는 점. 나의 경우는 벽산 아파트 뒤쪽으로 난 2차선 도로 길을 쭉 따라와서 그랜드마트에 들러 사과 한 쪽을 입에 물고 나오다 같은 동양어문학부였던 친구를 만나 적당히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지켜지지 않을 게 분명한 저녁밥 약속을 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의 차이는 그녀와 나의 살아온 삶이 서로 많이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예고해주는 것 같았다. 


  다시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운명이었다. 우리는 정확히 오후 1시 33분에 제기문구점에서 만났다. 그녀는 하숙방에게 원대한 꿈의 공간감을 선사할 세계지도를 원했고, 나는 지식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줄 세계지도를 바랐다. 세계지도를 먼저 산 것은 내쪽이었다. 나는 세계지도를 구입한 뒤, 건담 프라모델을 같이 구입할지 말지를 10분 넘게 고민 중이었다. - 무려 웨이브라이더 형태로 변형이 가능한 제타 건담이 있었던 것이다. - 그때 엠마라는 영문이 프린트된 황갈색 비닐봉지를 들고 그녀가 제기문구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도 꼭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아저씨, 세계지도 주세요!”라고 말했다. 아니 외쳤다. 그녀의 눈빛만 클로즈업해서 대사와 함께 들으면 마치 대항해시대의 탐험가가 신대륙을 찾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부하에게 “세계지도를 가져오너라!”하고 호방하게 외치는 것만 같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세계지도를 구입하는 장면을 법원에 제출할 증빙자료를 수집하듯이 세세하게 기억에 담았다. 세계지도를 받아들고 당장이라도 닻을 올릴 듯한 그녀의 표정과 지갑에서 꺼낸 천원짜리 세 장 중 마지막 것에 그려져 있던 동그란 무늬의 낙서. 그녀가 문구점 문을 나서며 “고맙습니다.”라고 했는지 “수고하세요"라고 했는지까지 또렷이 기억했다.(정답은 “고맙습니다.”) 그녀가 문구점 문을 나섰을 때 정확하게 챠임벨이‘따릉따릉땅따릉'하고 울렸었다. 

  

  그녀는 문구점을 나서 내가 왔던 그랜드마트가 있는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너무도 경쾌한 발걸음이어서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날 햇살은 적당한 온도로 기분좋게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가을을 담고 있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세계지도와 그녀의 손에 들린 세계지도를 번갈아 보며 이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적의 순간에는 그에 걸맞는 액션이 필요하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그녀가 잠시 멈춰서서 지도를 펼쳤다. 그녀와 지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내 발 앞꿈치를 밟을 것만 같았다. 나도 지도를 펼쳤다. 마케토니아, 헤르체고비나, 이스탄불.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가까이 있는 지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녀도 같은 곳을 보고 있으리라. 함께 여행을 간다면 이스탄불이 좋겠다. 그곳은 왠지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곳일 듯하다. 그녀는 몇 분인가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해 사막의 신기루처럼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 달려갔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기적은 두 번 오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세계지도를 산 특별한 인연이었지만 서로 이끌리면서도 누구 하나 먼저 고백을 못한 채 세월을 보냈고 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30대의 유명한 여행작가가 되어 강호동이 진행하는 유명 토크쇼에 출연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탄불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특히 밤하늘의 별이요.”

“제가 처음으로 세계지도를 산 게 9년 전인가 그래요. 신기하게 그때 처음 들여다 본 곳이 마케토니아, 헤르체고비나 그리고 이스탄불이었어요.”


나는 좀 더 빨리 언덕을 뛰어올라 가거나, ‘나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세계지도를 샀음.'이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녀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2010. 9.1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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