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망초 프롤로그 푸르던 잎사귀들은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들고, 외로운 영혼들은 바람에 휩싸인 채 떨어져 내립니다. 하늘은 내가 거니는 땅과 별개인 것을 자랑하듯 저만치 아득히 떨어져, 멀게만 보입니다. 나의 가을날도 어느새 스물 한번 째... 난 온몸을 감싸 도는 싸늘한 옷깃을 여미며, 분분한 낙엽사이를 거닐고 있습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너무 외롭네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즘 자꾸만 기억 속의 작은 그 소녀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맴 돕니다. 저기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나를 보며 미소 짓습니다. 작은 코스모스에 그 소녀의 얼굴이 비칩니다. 나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감돕니다. 그리곤 꿈처럼 달콤하게 내 작은 추억 속으로 나의 기억은 흘러듭니다. 소녀와 나 내일이면 난 엄마 곁을 떠나 수학여행을 가야한다. ..
머리를 자르는 사람 대체 왜 자꾸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거야! 그는 비명을 질렀다. 자고 일어나니 또 머리카락이 자라 있었다. 그의 꿈은 대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었다. 그런데도 쉼없이 머리카락은 자랐다. 부처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어, 삶은 고통의 연속이야. 그는 절망하고 절망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으나 20년 동안 기도를 해도 머리카락의 성장이 멈추지 않자 불교로 개종했다) 그가 언제부터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혐오하기 시작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도 잘 몰랐다. 단지 추측하고 있을 뿐. 아마, 어릴 적에 부모가 이혼했을 때부터였거나, 아니면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을 사촌동생에게 강탈당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7년간 짝사랑하던 이..
누군가를 용서해본 적이 있나요 곱단은 서둘러 그이를 깨웠다. 그이가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 이미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직감했다. 곱단은 그이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는 거예요. 죽더라도 우리 같이 죽는 거예요. 아시겠죠?! 곱단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이는 망설였다. 아니, 그보다는 자기 앞에 닥쳐온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곱단이 어제까지 알던 그이가 아니었다. 곱단은 흔들리는 그이의 눈빛을 바로잡으려는 듯이 그이의 손을 꼭 맞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밖에서 쿵!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두막집이 우르르 흔들렸다. 그이의 손은 더욱 더 떨렸다. 곱단은 그이를 품에 안고 어린애를 어르듯이 등을 ..
고모부와 고모는 그이가 풀려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자꾸만 그이의 일을 묻는 곱단에게 고모부는 그 사람 일은 입에도 담지 말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잘못하다가는 일가족 모두가 끌려가 동반 사형을 당하는 일도 있던 때였다. 곱단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을 그때 처음 몸으로 실감했다. 아무 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라도 그이가 언제 죽었고, 어디에 묻혔다는 얘기만이라도 듣게 되길 바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이가 잡혀간 날 밤 곱단은 까닭없는 고열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결에 고모부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이가 군에 수송되어 가던 중 지프에서 뛰어내려 산으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산에 불을 놓을 것 같다고, 여기서는 겨울을 나기 힘들 것 같으니 곱단과 사위..
다음 날 선 자리에서 곱단은 건너편 청년이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제 본 노을빛만 떠올랐다. 곱단은 그이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말을 붙여봤으면 좋겠다. 고모는 시어머니가 될 청년의 어머니에게 그럼, 조만간 조촐하게 식을 올리자며 인사를 하고 제안했다. 곱단은 그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쟁 통에 천애 고아가 되어버린 자기를 거둬준 분들이었다. 더 이상 짐이 될 수도 없었고, 일찍 혼인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다들 그렇게 혼인을 하던 때였다. 밤새 곱단은 자기 옆에 그이를 놓아보고는, 저는 그이의 연인이 될만큼 신여성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이의 목소리는 한 번쯤 들어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남자와 결혼하여 여느 아낙네처럼..
“안녕하십니까. 좋은 소식 가지고 왔습니다.” 반사적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이건 또 뭔가. “형제님, 잠깐만 시간 내주십쇼. 좋은 말씀 한 번 들어보세요.” 저는 아저씨 같은 형을 둔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신 음악을 켰다. 스피커의 볼륨 다이얼을 신경질적으로 돌렸다. 택스맨~ 이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존의 것인지 폴의 것인지 잘 모르겠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끈질긴 형제였다. 폴인지 존인지가 다시 한 번 더 외쳤다. 택스맨~ 복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이런 일까지 겪고 나니 더욱 열이 올랐다. 최근 통화목록에서 가스보일러 설치..
무의미한 밤 열대야도 막바지였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째서인지 잘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본네트를 열고 엔진 부근을 살펴보았다. 물론 엔진 구조에 대해 배운 것은 10여년 정도 전인 중학교 3학년 기술 시간이었다. 손가락 끝에 기름 때를 몇 번 묻혀보다가 다시 본네트를 닫았다. 운적석에 다시 앉아 시동을 걸었다.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시동이 걸렸다. 차를 돌려 오래된 주공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새벽 1시. 입구에 가까워지자 뒤늦게 주공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을 차들이 제멋대로 주차되어 있었다. 간신히 빈 틈들을 찾아 차를 몰았다. 세 번째 난관에 봉착했을 때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려고도 했다. 세번 째 난관이란 간신히 9인승 벤츠와 12인승 스타렉스 사이를 빠져나왔을 때 일어났다. 직진 방향..
겨울날은 간다 헤어지자... 우리 그만 헤어져 내가 잘 할게 헤어져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 그래 헤어지자 두 남녀가 등을 돌리고 돌아선다. 어슴새벽의 안개가 두 사람의 어깨에 아무도 몰래 내려앉는다. 그 안개에는 진득한 슬픔이 묻어 있어 두 사람을 오래토록 괴롭힐 것이 틀림없다. 몇 번째 보는 장면이다. 벌써 스무 번도 넘게 나는 ‘봄날은 간다’ 의 그 장면을 리플레이 해 보고 있다. 흐트러진 마음만큼이나 방은 정신없이 흐트러져 있다. 신혼집 같다던 깔끔한 내 방의 이미지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비로소 나는 제대로 된 자취생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별한 사람들에게 주말은 아마도 가장 끔찍한 날이 틀림없다.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정말 아무 일도. 그렇다고 뭔가 일을 만들어서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