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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머리를 자르는 사람

멀고느린구름 2014. 1. 24. 10:12




머리를 자르는 사람

 

 

 

   대체 왜 자꾸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거야! 그는 비명을 질렀다. 자고 일어나니 또 머리카락이 자라 있었다. 그의 꿈은 대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었다. 그런데도 쉼없이 머리카락은 자랐다. 부처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어, 삶은 고통의 연속이야. 그는 절망하고 절망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으나 20년 동안 기도를 해도 머리카락의 성장이 멈추지 않자 불교로 개종했다)

 

  그가 언제부터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혐오하기 시작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도 잘 몰랐다. 단지 추측하고 있을 뿐. 아마, 어릴 적에 부모가 이혼했을 때부터였거나, 아니면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을 사촌동생에게 강탈당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7년간 짝사랑하던 이가 삭발을 하고 출가했던 때부터가 아닐까하고.

 

  그는 심지어 자신의 머리카락뿐 아니라 타인의 머리카락도 혐오하기 시작했다. 저런 더러운 것을 어쩜 그렇게 태연하게 머리에 짊어지고 다니는 거지. 종종 그의 눈에 머리카락은 메듀사의 뱀처럼 보이기도 했고, 파리들이 잔뜩 머리에 달라붙어 손을 비비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가장 끔찍했던 장면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우연히 앞자리의 뒷통수를 보았는데 그것이 마치 바퀴벌레들의 운동장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끔찍한 인간들! 그의 머리카락에 대한 혐오는 결국 인간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졌고 그는 방문을 걸고 더 이상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아니 이제 그에게는 면도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는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가장 고가의 전동 면도기를 구입했다. 그는 면도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마치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여겼다. 면도를 할 때 그는 경건해졌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간은 대머리였고, 두 번째가 중들이었다. 대머리는 완전무결했다. 그 빛나는 새하얀 머리! 그건 순백의 상징, 순수의 극이었다. 제기랄! 그들은 신에 의해 선택 받은 존재였다. 중들의 경우 대부분 머리를 밀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아직 군데군데 듬성듬성 남은 그들의 머리카락이 보이곤 했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중들의 그 존경스러운 머리 때문에 개종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절을 걸어나오던 중 한 중과 마주쳤는데, 그 중의 머리 한 쪽 끝에서 피식피식 웃고 있던 아주 조그만 구더기 같은 머리카락을 본 후로는 중들을 모두 믿지 못하게 되었다.

 

   외출을 끊고 그가 방에서 연구하고 있는 것은 제모제였다. (그는 발모제를 연구하는 치들을 경멸했다) 그는 수 많은 논문들을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하지만 제모제를 연구하는 학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물론 허벅지나 성기에 바르는 제품들은 많지만) 머리카락 달고 사는 인간들이 다 그렇지 뭐. 그러던 중 스웨덴의 한 연구사례를 발견하게 되었다.

 

   스웨덴의 한 남자는 하루에 머리카락이 1센티미터씩 자라는 끔찍하게 혐오스런 인간이었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함부로 잘랐다가는 오히려 더 길게 자라버리기까지 했다.(끄악!) 남자는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서 머리카락을 배낭에 넣고 다녀야만 했다. 남자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제모제를 연구했다. 20년의 세월 끝에 제모제를 만들어냈지만 남자는 그 다음날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사고현장에서 발견된 남자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남자가 무엇 때문에 행복했을까 생각했다. 제모제를 발견해서? 더 이상 혐오스런 인간으로 살지 않게 되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그의 머리카락이 또 0.1밀리미터 자랐다. 그는 그의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자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 소름끼치는 느낌을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 그만이 느낄 수 있었다. 으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서랍에서 서둘러 전동 면도기를 꺼냈다. 그만의 그레고리안 성가가 울려퍼졌다. 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가 느끼지 못하는 0.01 밀리미터의 머리카락이, 혹은 0.001 밀리미터의 머리카락이 자라고 또 자라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의 감각도 자라고 자라서 그 0.01 혹은 0.001 밀리미터의 머리카락이 성장하는 것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그는 단 한 순간도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든 순간순간이 경건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만의 그레고리안 성가와 함께 말이다.

 

   훗날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그로부터 20년 후 그는 완벽한 제모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실수로 길바닥에 제모제 용액을 모두 엎질러버리고 만다. 그날부터 그의 머리카락은 난폭한 주정뱅이처럼 자라나기 시작한다. 다음 날 그는 자기의 목을 스스로 잘라버린다. 떨어져 나간 그의 얼굴은 영원히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한다.

 

 

 

2008. 1. 1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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