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K의 표정은 월드컵 결승전 후반 마지막 1분, 1대 1 상황에서 자살골을 넣은 에이스 스트라이커 같다. 절망과 공포. 뭐라고? K의 반문. 가지 않겠다고, 나의 응답. 다시 뭐라고? K. 안 가! 나. 조금 전까지 카렌 카펜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흐르던 까페가 아니다. 음악은 멎고, 테이블도 커피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곳곳에 잿빛 크레이터가 드러나보이는 달의 표면 위다. K와 나, 그리고 Y가 있다. 미쳤어? K의 말이 거칠어진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 대신 Y에게 ‘미안해'라고 사과한다. 지금 뭐하는 거야?! K의 목소리는 내 심장을 찢을 듯 솟구쳐 온다. 머리가 어지럽다. 두 사람이 먼저 얘기를 해야할 것 같네, 난 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Y는 텅빈 공간에 우뚝 서 있는 파란 문을 가리킨..
2 그래서 말인데, K의 목소리가 진지하다. 응.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우리 서로 정리해야할 것들을 정리하자구, K는 정해진 대본을 읊듯이 말한다. 분명 몇 번이고 되뇌어본 말일 것이라 여기니 피식 웃음이 난다. 너도 참 이럴 때 웃음이 나와? 그래도 우리 사귄 게 자그마치 7년이었다고, K는 당황한 표정이다. 응, 그 7년이 이렇게 기묘한 곳에서 끝이 난다니 웃음이 나오네. 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정리한다는 말일까. 7년의 세월을, 그 속에 깃든 갖가지 사연들을, 함께 갔던 장소와 함께 듣던 노래, 그동안 우리가 먹었던 음식의 품목들을 어떤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일까.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다. 포맷이 불가능하다. 바탕화면에 있던 것을 폴더의 폴더, 그 폴더의 폴더 속쯤으..
달에서 1 우리가 와 있는 곳은 달의 뒷편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처음 그 자리 그대로였다. 우리는 분명히 대학로 뒷편의 낙산공원 벤치에 앉아 개기월식을 보고 있었다. 11년마다 찾아온다는 개기월식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는 꼭 7년이었다.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완전히 덮어버렸을 때였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모든 것이 선명해졌을 때는 이곳이었다. 장소가 뒤바뀐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K는 감청색 스웨터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붉은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등에는 항상 짊어지고 다니던 통기타 가방 - 그는 그것을 악기를 담는 용도보다는 정말 가방처럼 이용했다. - 이 메어져 있다. 나 역시 늘 입고 다니던 붉은 빛 겨울 코트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애용하던..
진보와 진화 6 나 : 네 여러분 그럼 다시 이어서 세기의 토크쇼 ‘진보와 진화'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 대표님께서 압둘 아자르 성하에게 ‘양말 벗기 무브먼트'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는 데 대체 그 주체가 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에 노동자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라는 논지의 질문을 하셨고, 아자르 성하는 고 대표님의 자세를 지적하며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기를 하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고 대표님, 준비가 되셨습니까? 고 : 그거 뭐죠? 저기… 아. 그래. 오 프리더엄~ 나 : 하하 네. 준비가 되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아자르 성하 말씀 하시겠습니까? 압 : 오 프리덤. 제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는 것..
강아지를 부탁해 “애 과외비가 얼만지나 알아! 집안 살림을 좀 하든지! 나가서 일을 찾아보든지!! 이제 아주 지긋지긋해!!!” 지긋지긋한 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아빠는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시 라이터를 가지러 들어온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이에게 “아빠 라이터 못 봤냐?”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이의 아빠는 다시 나갔다. 아이의 엄마는 그 하는 양을 사납게 지켜본다. 아이에게도 아이가 사는 집에게도 이제는 익숙한 풍경. 아이의 아빠가 실직을 한 것은 1년 전이었다. 지금은 보험회사를 다니는 아이의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만 세 식구가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초등학교 방학이 되어 엄마가 출근을 하면 아이는 집에 혼자 남았다. 아빠는 엄마가 출근한 뒤에 곧바로 나가서는 저녁 늦..
4페이지 분량의 마지막 자기소개서 오늘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 자소서를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결정은 매우 심대한 실존적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상당히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한 것이다. ‘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이니 뭔가 또 거대해지는데, 아서 코난도일이나 애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에 나올 법한 그런 기묘한 ‘사건'은 물론 아니다. 굳이 그쪽으로 대자면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문을 열고 집을 나선 순간 그 바로 앞에서 범인이 사건에 대한 상세한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기다리고 있다가, 탐정에게 건내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그런 사건이다. -성향에 따라 이 비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 오전에 의류 판매를 하는 A기업의 공채 면접장에 가서 나..
11. 진보와 진화 4 진 : 먼저 기회를 주시니 얘기하지요. 인간 자신의 변화. 뭐 생물학적 변화이든, 정신적 변화이든 그것을 ‘진화'라고 전제합시다. 그리고 사회 제도의 변화 여기서 제도의 변화란 반드시 사회적 약자, 소수자, 그리고 노동자-민중 계급의 이익을 도모하는 제도적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회 제도의 변화를 ‘진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사회자께서 하신 질문은 다음과 같지요. 진화가 먼저냐, 진보가 먼저냐. 진화를 이야기하는 쪽에서는 항상 러시아 혁명을 근거로 삼습니다. 붉은 혁명으로 유럽의 절반이 공산화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깃발을 내리지 않았느냐. 그 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그 핵심에는 결국 ‘인간'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진화'를 말..
9. 진보와 진화 2 나 : 자, 그럼 본격적인 토론을 시작하겠는데요. 가장 먼저 짚어봐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양말 벗기 무브먼트. 아주 전 세계적인 영성 운동인데요. 국민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말 벗기 무브먼트가 우리네 삶을 나아지게 했을까요. 아니면 그대로일까요. 혹, 퇴보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각 패널 분들의 생각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요번에는 시간 제한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특별한 규칙도 없습니다. 심지어 상대방에게 욕을 해도 좋습니다. 아주 파격적이지요? 단, 토론이 더 이상 진행이 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 될 때에만 제가 개입하겠습니다. 음.. 그럼 먼저 우리 최 박사님께서 먼저 말씀 해주실까요. 최 : 네, 성하의 2328번째 공식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