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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4

멀고느린구름 2013. 9. 27. 04:21




 다음 날 선 자리에서 곱단은 건너편 청년이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제 본 노을빛만 떠올랐다. 곱단은 그이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말을 붙여봤으면 좋겠다. 고모는 시어머니가 될 청년의 어머니에게 그럼, 조만간 조촐하게 식을 올리자며 인사를 하고 제안했다. 곱단은 그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쟁 통에 천애 고아가 되어버린 자기를 거둬준 분들이었다. 더 이상 짐이 될 수도 없었고, 일찍 혼인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다들 그렇게 혼인을 하던 때였다. 밤새 곱단은 자기 옆에 그이를 놓아보고는, 저는 그이의 연인이 될만큼 신여성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이의 목소리는 한 번쯤 들어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남자와 결혼하여 여느 아낙네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인생일 것이었다. 


  청년과 선을 본 후로 곱단은 몸에서 몹시 열이 나기 시작하여 앓아 눕고 말았다. 3일을 누워 지냈다. 다른 동네에서 유명한 노 의원이 왕진을 왔다. 노 의원은 고모 내외를 물리고는 곱단에게 물었다. 가슴에 품은 사내가 있느냐고. 곱단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보아야 할 사람을 보지 않고 살려하면 눈을 감고 사는 것과 같은 게야. 눈 뜬 사람이 억지로 눈을 감으려 하니 몸이 아플 밖에. 노 의원은 보따리에서 건조시켜 다져 놓은 잎이 든 조그만 병을 꺼내 곱단 머리 맡에 놓았다. 박하 잎이야. 요새 고뿔이 번지니 자네 가슴에 품은 사내가 혹 앓거든 이거라도 내어주며 말이라도 붙여보게. 한을 품고 살지 말게나 어리석게. 노 의원은 그러고는 헛기침을 하며 방을 나섰다. 노 의원은 감기 기운이 있어 박하를 처방하고 가니 조금씩 뜨거운 물에 타서 먹이라며 고모에게 종이에 싼 박하잎을 따로 주었다. 곱단은 노 의원이 놓고 간 유리병을 품에 넣었다. 벌써부터 그이에게 유리병을 내미는 제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과연, 마을에 고뿔이 돌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곱단은 꽁초를 주으며 귀는 동네 아낙들의 목소리를 향해 쫑긋 세웠다. 아낙들이 혹여 그이에 대한 소문을 전해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낙들은 그이를 선비 청년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선비라고 부를만큼 그이의 품행이 방정하다는 뜻이다. 곱단은 제 지아비의 칭찬을 전해 듣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정오가 지나고 곱단은 고모 내외에게 부러 책방 쪽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거기에 오늘따라 꽁초가 많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고모 내외는 곱단을 천상 착하디 착한 아이라고 여겨 아무 의심 없이 곱단을 따랐다. 곱단은 쇠스랑을 발목에 달고 걷는 기분이 들었다. 해도 그이를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죄를 지어보리라 마음 먹는 것이다. 책방 앞에 도착해 곱단과 고모 내외는 꽁초를 줍기 시작했다. 한눈에도 꽁초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책방 안에서 커다란 기침 소리가 났다. 사내의 기침 소리였다. 곧 또 한 번 기침 소리가 났다. 에구, 저런 선비 청년이 고뿔 걸렸나보네. 라며 고모가 혀를 끌끌 찼다. 곱단은 어여쁜 봄꽃을 본 여아 마냥 함박 웃음을 지었다. 고모가 보고 선비 청년이 감기 걸린 게 좋아 그런 거냐 물었다. 곱단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도 점점 온 몸으로, 핏속으로 번져드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고모 내외도 피식 웃고 말았다. 시집 갈 때가 되어 좋아 그러려나 했다. 책방 안에서 다시 기침 소리가 났다. 곱단은 웃고 또 웃었다. 


  다음 날 곱단은 친구를 만날 일이 있다고 전하고는 꽁초를 함께 주으며 친분을 쌓은 말숙이와 함께 책방으로 갔다. 곱단이는 말숙이에게 그저 책을 한 권 빌려 읽어보고 싶다고만 전했다. 말숙이는 소학교를 다녀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말숙이는 곱단이가 까막눈이라는 것을 몰랐다. 책방 문을 밀었다. 창으로 햇살이 비껴드는 가운데 사방으로 천장까지 빽빽하게 책들이 꽂혀 있었다. 가장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서양식 흔들의자가 있었고, 거기에 그이가 앉아 흔들거리며 책을 읽고 있었다. 전처럼 흰셔츠에 조끼, 검정 면바지 차림이었다. 곱단은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이가 흔들거릴 때마다 자기의 마음도, 온 세상도 흔들리고 있었다. 말숙이가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그이는 두 사람을 알아채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가벼운 목례를 했다. 어떤 책을 찾으시나요. 곱단은 처음으로 그이의 목소리를 전해들었다. 됐다. 이제 어떤 사내와 혼인을 하든,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든 됐다. 굳이 유리병을 전해 줄 일도 없겠다 생각했다. 곱단은 말숙이의 어깨를 손가락을 콕콕 찌르며 돌아가자는 신호를 했다. 말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난 소설 책을 소개해달라고 말했다. 그이는 소설책도 종류가 많다고 말했다. 어떤 내용이 좋으냐고 묻자, 말숙이는 잠시 고민도 않고 연애 이야기가 좋지요 했다. 곱단의 얼굴이 괜히 붉어졌다. 그이는 서가를 둘러보며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연신 기침을 했다. 말숙이가 고뿔 걸리셨어요 했다. 그이가 그렇다고,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곱단이는 속주머니에 넣어온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2013. 9. 2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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