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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8

멀고느린구름 2013. 10. 17. 07:17




   고모부와 고모는 그이가 풀려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자꾸만 그이의 일을 묻는 곱단에게 고모부는 그 사람 일은 입에도 담지 말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잘못하다가는 일가족 모두가 끌려가 동반 사형을 당하는 일도 있던 때였다. 곱단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을 그때 처음 몸으로 실감했다. 아무 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라도 그이가 언제 죽었고, 어디에 묻혔다는 얘기만이라도 듣게 되길 바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이가 잡혀간 날 밤 곱단은 까닭없는 고열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결에 고모부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이가 군에 수송되어 가던 중 지프에서 뛰어내려 산으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산에 불을 놓을 것 같다고, 여기서는 겨울을 나기 힘들 것 같으니 곱단과 사위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야겠다고. 곱단의 방에서 끙끙 앓던 소리가 멈춘 것을 확인하고서야 고모부 내외는 잠이 들었다. 곱단은 입을 틀어막은 채 두통과 고열을 견뎠다. 뒷간에 가는 척하며 안방의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한 곱단은 그대로 산길로 내달렸다. 입던 옷 그대로였고, 아무 짐도 챙기지 않았다. 그저 그이를 한 번만 더 보고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산에 불을 놓기로 이미 작심한 터라 그런지 산길에 군인들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그이가 어디쯤에서 탈출을 했는지, 어느 산골짜기로 숨어들었는지 당연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곱단은 무작정 칠흑 같은 숲에 삼켜졌다. 호랑이며, 늑대며 하는 맹수들이 여전히 어슬렁거리던 시절이었다. 곱단은 자기가 먹이가 될 것은 생각 않고, 그이가 혹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근심이었다. 동이 틀 무렵에는 제법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으나 곱단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지, 강줄기를 향해 내려가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다. 곱단은 풀썩 바윗가에 주저 않았다. 이리 될 줄 알았다면 말숙을 따라서 천주라도 믿을 것을 그랬다고 저 자신을 원망했다. 곱단은 잘 알지도 못하는 천주를 호명하며 그이를 꼭 한 번만 더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늘이 빙 돌더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김곱단 할머니는 말을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는 일을 되풀이한다. 나는 이야기에 도취되어 간절히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김곱단 할머니의 표정에 생기가 감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만나셨구나. 다행히 원을 푸셨구나. 마치 내가 그 시절 곱단이 된 것만 같다. 왈칵 눈물이 솟구치려는 것을 겨우 진정 시킨다. 곱단의 울음만은 아니었다. 내 몫의 울음도 함께 울컥 솟구치려고 몸 속에서 고여들고 있는 것이다. 숨을 죽이고 집중하자 김곱단 할머니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한다. 두근 두근 두근. 할머니가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입술을 오물거리기 시작한다. 정원에서 새 한 마리가 청명한 하늘로 포르르 날아오른다. 


   정신을 차린 곱단이 처음 목격한 것은 티없이 푸른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매 한 마리였다. 아직 숲 속이었다. 문득 온기가 느껴졌다. 모포 같은 것을 덮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타닥타닥 마른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나지 못하고 고개만 돌려 보았다. 군복 차림의 사내가 모닥불에 잔 가지를 넣고 있었다. 군인들이 다시 수색을 시작했구나 싶었다. 다시 스르르 눈을 감으려다 퍼뜩 정신이 들어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아... 군인이 아니다. 그이였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 그이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말았지만 곱단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이다. 군인이 아니다. 그이가 놀라 다가와 괜찮느냐고 물었다. 틀림없는 그이의 목소리였다. 곱단은 다짜고짜 그이의 팔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이가 조심스럽게 곱단의 등을 토닥였다. 곱단은 나중에서야 자신의 그런 행동이 둘을 죽음으로 몰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그이는 묵묵히 곱단을 받아주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그이도 곱단에게 연정을 품었던 것이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곱단은 정신을 차리고 그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사하셨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그저 연신 그이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구나, 진짜구나 하고 자꾸만 되풀이해 확인하고 싶었다. 그이와 곱단은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부둥켜 안은 채 시간이 사라진 숲에 온기를 퍼뜨렸다. 곱단이 울다 지쳐 다시 한 번 잠들었다 깨고 다시 잠들기를 몇 번 반복한 뒤에야 둘은 비로소 일어서서 함께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제법 깊은 계곡을 아슬아슬하게 건너 길도 한 번 나지 않은 듯한 숲을 헤친 다음에야 절벽가에 놓인 낡은 오두막집에 다다랐다. 그이는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곱단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말하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은 없어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예감을 억누르며 곱단은 그 꿈같은 오두막에 첫발을 내딛었다. 




2013. 10.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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