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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13

멀고느린구름 2013. 11. 10. 09:02




누군가를 용서해본 적이 있나요 



   곱단은 서둘러 그이를 깨웠다. 그이가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 이미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직감했다. 곱단은 그이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는 거예요. 죽더라도 우리 같이 죽는 거예요. 아시겠죠?! 곱단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이는 망설였다. 아니, 그보다는 자기 앞에 닥쳐온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곱단이 어제까지 알던 그이가 아니었다. 곱단은 흔들리는 그이의 눈빛을 바로잡으려는 듯이 그이의 손을 꼭 맞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밖에서 쿵!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두막집이 우르르 흔들렸다. 그이의 손은 더욱 더 떨렸다. 곱단은 그이를 품에 안고 어린애를 어르듯이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같이 있을 게요. 걱정 마세요. 그이의 떨림이 조금씩 누그러져 갔다. 곱단은 말을 이었다. 약속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같이 있기로. 만약 잠시 떨어지더라도 꼭 다시 만나기로. 그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쿵! 이제껏 중 가장 큰 소리가 나더니 튼튼한 나무 빗장으로 걸어두었던 문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통나무를 둘러멘 마을 장정들이 그대로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장정들은 밖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여기 있습니다요! 하고 외쳤다. 더 많은 사람들의 다급한 발 소리가 들려왔다. 곧 쓰러진 문 쪽에서 이장과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나타났다. 이장은 곱단을 보며 깜짝 놀라며 “네 이년! 어딜 갔나 했더니 역시 저 빨갱이 놈이랑 통정을 했구만. 화냥년 같으니!” 하고 호통을 쳤다. 곱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죽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괜찮다 비록 오래 살지 못했으나 그이와 함께 보낸 닷새는 지난할 것이 뻔한  여생보다 갑절은 행복한 시간일 것이다.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족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곱단은 제 목으로 섬찟하고 차가운 기운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떴다. 아… 그것은 칼이었다. 한 눈에 봐도 정성껏 갈아놓은, 곱단의 목 정도는 간단히 베어버릴 수 있을 듯한 칼이었다. 칼을 쥔 사람은 그이였다. 곱단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 말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생각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이는 곱단의 목에 칼을 겨누고 이장 일행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이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리지 않았다. 단지 매우 흥분되고 격앙된 소리라는 것만 인식할 수 있었다. 그이는 함부로 곱단의 몸을 끌고 밖으로 나서 산비탈을 한참 걸어올라갔다. 더 움직이면 발포하겠다는 소리가 이장 쪽에서 들려왔다. 그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곱단의 발이 거의 끌리다시피 하는 것도 모른 채, 곱단의 허벅지 이곳저곳이 잔 나무가지에 긁히는 것도 모른 채 곱단을 이끌고 등성이까지 오르더니, 그곳에 곱단을 버려두고 비탈 아래로 구르다시피 하여 달아났다. 이내 군인들이 요란한 구둣발 소리를 내며 뛰어올라와 비탈 아래 쪽을 향해 총질을 해댔다. 곱단은 등성이 위에 서서 멍하게 총알이 향하는 비탈 아래 쪽을 내려다보다 속이 빠져나간 허물처럼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을로 돌아와 있었고, 집이었다. 곁을 고모와 고모부가 지키고 있었다. 고모부는 곱단이 깨어나자마자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했다. 너는 인질로 붙들려 간 걸로 맞춰놨다. 여군 장교가 와서 네가 그놈이랑 통정을 했는지도 다 조사를 했다. 다행히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다. 무조건 잡아 떼고 그놈이 평소에도 너를 꼬이려고 했었다고 해라. 그래야 너도 살고 우리도 산다. 고모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군 장교가 들어와 닷새간의 일들을 물었다. 곱단은 아직도 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고모부가 시킨 대로만 말을 반복했다. 여군 장교의 취조가 끝나자 고모부는 장교에게 흰 봉투를 건넸다. 여군 장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다음 날 곱단네 식구는 짐을 꾸려서 마을을 떠났다. 마을 어귀에서 곱단네 식구는 곱단과 혼인을 약조한 청년네 식구와 만났다. 청년의 큰 아버지가 서울에서 조그만 약제상을 차렸다는 전보를 받고 함께 상경하기로 한 것이었다. 서울에 도착하고 일주일 후 곱단은 청년과 혼사를  치뤘다. 첫날 밤이 되어서야 곱단은 제 정신을 찾았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차리고 통곡했다. 사람들은 그저 곱단이 처녀를 잃을 것이 두렵고 수치스러워 우는 것으로 여겼다. 청년은 억지로 곱단을 안지 않았다. 그로부터 61년이 지났다. 



2013. 11. 1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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