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아닌 지금…’ 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가령 2년 전 헤어진 연인과 자주 드나들던 바에서 그 당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게 된 지금과 같은 때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그날도 오늘과 같이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였다. “전생이 있다면 난 분명 러시아인이었을 거야.”라고 나는 무심코 내뱉었다. 나는 J와 12월의 마지막날, 흡사 모스크바의 거리와도 같았던 눈덮인 세종로를 거닌 후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홍대의 단골 바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째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내 몸 속의 어떤 피가, 아마 그건 투명한 하얀색일 거야. 아무튼 그 피가 보드카를 원하거든. 바로 지금처럼.” “하하. 뭐야. 단순히 알콜중독자의 변명 아냐.” “진심이야...
지난해 가을부터 키우던 아이가 겨울이 되자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물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그래도 매일 아침 꼬박꼬박 물을 주며 "힘내. 이제 곧 봄이 올 거야. 따뜻해질 거야." 라고 말을 붙이고, 잎을 쓰다듬어 주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나아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직 이파리의 빛이 초록색이니까 죽지는 않은 거야 라고 생각하며 꾸준히 물을 주고 말을 걸었다. 그리고 2월이 되자 시든 줄기 사이로 병아리 눈물 같은 새싹이 돋아났다. 이어서 저쪽에서 이쪽에서도 하나 둘씩 새싹이 와와 돋아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 내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의 제목이다. 러시아의 작가주의 영화감독 비탈리 카네프스키 감독의 영화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황폐화된 시..
마피아 "그러니까 말야. 아까부터 선배의 눈동자가 굉장히 흔들리고 있거든. 대체 왜 그런 걸까. 나는 선배가 마피아가 틀림없다고 생각해." 날카로운 C가 말했다. 단호한 어조였다. 이제 막 게임을 참가한 사람이라면 '이런 끼어들자마자 끝나버렸군.'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지목을 당한 A선배는 말 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A선배는 담담하게 "나는 아니다."라고 교과서 2페이지를 펴는 학생처럼 답했다.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 되려 신뢰감을 주었다. "맞아. 선배가 마피아라면 아까 98학번 D선배를 죽이지 않았겠지. 이제 마피아는 단 한 사람이고. 우리는 4명이나 남았으니까 말야." 남몰래 A선배를 좋아하고 있던 안경을 쓴 B의 말이었다. "일리가 있어. 잠깐! 아까 D선배를 죽일 때 손을 내리지 않은 게 단발..
수박바 작사/곡 멀고느린구름 요즘에는 수박바가 왜 그리 좋니/ 아직 여름도 아닌데 자꾸 먹고파 나의 짝궁 그 아이도 좋아했었지/ 나는 맨날 침만 먹고 바라봤는데 괜찮았어 그것만이 내 세상인걸/ 너를 보면 그 무엇도 슬프지 않아 그 아이는 아마 모를 걸 내가 자길 좋아했던 걸 *아 너무나도 아 맛있어요/ 아 수박바 아 먹고파요/ 나 돌아갈래 다 돌려줘요 겨울에도 수박바가 있음 좋겠어/ 봄 여름만 있으니까 슬퍼지잖아 현재란 건 그 언제나 서글퍼지고/ 사람들은 과거에 기대어 사는 것 그 아이는 아직 웃을까 그때처럼 하늘을 볼까 **아 너무나도 아 맛있어요/ 아 수박바 아 먹고파요/ 나 돌아갈래 다 돌려줘요
붓다, 사랑을 발견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생명 사이의 사랑의 진화) 글쓴이: 멀고느린구름 0. 작은 인디언, 붓다를 만나다. 고등학교 1학년의 어느 여름. 나는 곧 있을 문예부의 문학기행을 위해 천성산 아래에 있는 내원사를 찾아갔다. 길을 잃고 헤매던 나는 우연히 이상한 숲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걷던 중 외딴 곳에 있는 정사를 한 곳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지율스님이 계셨다. 그 시절의 나는 중학교 적에 읽은 류시화 시인의 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감화되어 아메리카 원주민의 정신세계에 심취해 있었다. 집을 나간 어머니와 형의 빈자리를 술로 채우던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던 그 시절의 나는 내 속의 온갖 정신적인 방황을 자연 속의 생명들과 교감하고 명상하는 것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