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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그때가 아닌 지금

멀고느린구름 2011. 2. 10. 04:28

 




  ‘그때가 아닌 지금…이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가령 2년 전 헤어진 연인과 자주 드나들던 바에서 그 당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게 된 지금과 같은 때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그날도 오늘과 같이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였다. 


“전생이 있다면 난 분명 러시아인이었을 거야.”라고 나는 무심코 내뱉었다. 나는 J와 12월의 마지막날, 흡사 모스크바의 거리와도 같았던 눈덮인 세종로를 거닌 후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홍대의 단골 바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째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내 몸 속의 어떤 피가, 아마 그건 투명한 하얀색일 거야. 아무튼 그 피가 보드카를 원하거든. 바로 지금처럼.”

“하하. 뭐야. 단순히 알콜중독자의 변명 아냐.”

“진심이야. 진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 사람은 지구상에 넘쳐나. 하지만 들어봐. 저 리히터의 연주를. 러시아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연주야. 다르다구. 전혀 다른 거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쎄…”


  J는 잔 속의 보드카를 들이켰다. 보드카를 마시고 있는 그는 흑백 사진 속의 라흐마니노프를 조금 닮았다. 짧게 자른 단정한 머리에 살짝 아래로 쳐진 눈매, 끝이 몽툭한 코.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처럼 다문 입술. 오히려 J야 말로 반드시 전생에는 러시아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블라디보스톡과 시베리아를 오가며 악기를 파는 악기상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나도 반드시 전생에는 러시아인이어서 그의 곁에 머물며 영혼까지 얼게한다는 북국의 추위로부터 조금이나마 그를 지켜주고 싶은 것이었다. 


“날 알콜중독자 취급 말라구. 보드카를 처음 먹인 것두 자기면서.”

“내가 죄를 지었군. 천국에 가긴 이제 글렀어.”

“회개하면 가능해. 어때 회개할 생각있어?”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간단해. 날 러시아로 데려다주면 돼.”

“하하. 그게 뭐야.”


  J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가 웃을 때 잡히는 눈가의 주름이 좋았다. 


“좋아. 조만간 경비행기를 한 대 살 건데, 그걸 사게 되는 날 첫 시험비행으로 널 러시아로 데려갈게.”

“정말? 그 조만간은 대체 언젠데?”

“조만간 경비행기를 살만한 돈이 생기는 때지.”

“100만년 뒤라는 소리잖아.”


  J가 한 번 더 웃었다. 


  100만년 뒤에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환생하게 되더라도 그 웃음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혼자 술잔에 보드카를 따른다. 주인은 어떤 의도인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무한반복 시키고 있다. 1악장에서 3악장으로. 3악장은 다시 1악장으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한다. 마치 사람의 윤회처럼. J는 기독교인이어서 윤회를 믿지 않는다. 1악장에서 2악장으로 넘어가는 즈음, 내 좌측 옆 테이블에 악기를 둘러 멘 남자가 혼자 와서 앉는다. 말쑥한 수트 차림에 머리카락은 짧다. 


  그날, J는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어째서냐고 묻지 않았다. 모두가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는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했다.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지 않고서는 먹고 살아갈 수 없는 배역이었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오케스트라란 두 손으로 충분히 꼽을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피아노를 전공한 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그래도 생계를 유지할 정도는 벌 수 있었지만, 콘트라베이스를 배우려는 학생은 적어도 이 나라에는 없었다. 그 무렵 J는 은행원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은행창구 어딘가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지만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은행원이라는 직업은 어딘가 오케스트라 속의 콘트라베이스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다. 


“나중에 돈을 더 이상 모으지 않아도 될 때가 되면 말이야. 그러니까 자식들도 다 자라고, 직장에서도 물러나야 할 그런 때가 되면 말야. 니가 말한 그 경비행기를 타고 러시아로 가자. 그리고는 수통에다 보드카를 잔뜩 담고서, 음악 여행을 하는 거야. 너는 콘트라베이스를 들고, 나는 멜로디언이 좋을까. 그렇게 작은 재즈 밴드 같은 걸 만들어서 모스크바의 거리에서든, 안나푸르나에서든 우리가 청춘의 어느 순간 들려주고 싶었던 소리를 들려주는 거야.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해. 이봐요들. 잊지 마요. 우리도 이렇게 간직하고 있잖아요. 라고. 어때? 아름답지 않니?”


  나는 취기가 올라 있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게 내뱉었지만 다 하고 나니 그럴싸한 말이 되어 있어 꽤 흡족했다. 


“아름다워.”


  J가 미소를 지었다. 신뢰가 가는 미소였다. 아, 이 녀석 사실은 은행원이 천직 아냐 라는 생각. 


  옆의 남자가 서버에게 보드카를 주문한다. 나는 남자가 한 쪽에 내려놓은 악기 케이스를 곁눈질로 유심히 쳐다본다. J도 분명 저 정도 크기의 케이스에 콘트라베이스를 넣어 다니곤 했었다. 어느새 내 신경은 온통 남자에게로 향해 있다. 흘끔흘끔 보드카 잔을 쥔 남자의 손가락을 살핀다. 끝이 몽툭한 것이 현악기를 오래 연주한 사람의 손가락이다. J는 다시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꾸 볼수록 남자는 J와 닮아 있다. 그럴리가.  


  J와 나는 100만년 뒤의 러시아 여행을 계획한 그날로부터 100일 뒤 헤어졌다. 특별할 것 없는 이별의 사유였다. 지구 구석구석에서 분명 수많은 변주의 형태로 존재할 이별의 사유였다. 100만년 뒤라는 시간은 지나치게 무의미했고,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다. 한 달 뒤라던가, 적어도 100일 뒤라던가. 뭔가 착실한 대학생다운 계획을 했어야 했다. 100일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와 저축을 해서 돈을 모아 몇 월 며칠 몇 시에 몇 박 며칠을 일정으로 러시아 어디 어디를 여행하자와 같은 실사구시적인 프로젝트 말이다. 


  J와 헤어진 후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아니, 명백히 하자면 만나지 못했다. 몇몇 남자를 소개받아 잠깐씩 커피를 마셔보기도 했지만, 보드카를 함께 마실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는 몸에서 러시아의 바람 냄새가 나는 남자가 필요했다. 비극적이지만 우연히 만나게 된 러시아인에게서도 그런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 냄새는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J가 은행원이 된 순간에 말이다. J가 제2금융권의 은행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와 함께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하던 상대와 헤어졌을 때, 자기만은 그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좀처럼 잊히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막상 그가 다시 고백해온다면 부담스러워하거나, 최소한 매우 주저하고 망설이게 될 이들마저도. 누구도 우리의 역사를 역사서에 특별하게 기록해주지 않으므로 우리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자기의 역사를 심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기대는 번번이 실패하기 마련이었다.   


  남자가 혹시 J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빠르게 그가 J가 틀림없다 라는 생각으로 옮겨간다. 나는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과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피부가 좀 상해 있다. 어제 밤늦게까지 라디오 방송을 들은 탓이다. 후회한다. 혹 남자가, 아니 만약 J가 말을 걸어왔을 때의 대응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점검한다. 머릿속이 시베리아의 벌판처럼 하얗다. 취기가 점점 더 올라와 두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듯하다. 나는 남자의 악기 케이스를 다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콘트라베이스가 저 속에 들어 있을까… 너무 오래 쳐다보았는지 남자가


“아, 베이스기탑니다.”


라고 친절히 말해주며 미소짓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 네. 죄송합니다.”라고 답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J의 미소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때가 아닌 지금…’이라고 생각해본다. 지금 여기, 지금 나의 마음을 간직한 채로 J와 마주한다면… 나는 그에게 ‘콘트라베이스를 계속 연주해.’라고 단호하게 말해줄 수 있을까. 혹은, ‘내일 당장 러시아로 떠나자.’라고 보드카에 기대어 말해볼 수 있을까. 겨울은 대부분 지난 해의 겨울,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온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도 그 모습 그대로 되풀이 되곤했다. 잔 속에 남은 보드카를 들이킨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1악장이 다시 재생된다.   




2011. 2. 10. 새벽에.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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