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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論

불교 - 붓다 사랑을 발견하다

멀고느린구름 2011. 2. 5. 20:10

붓다, 사랑을 발견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생명 사이의 사랑의 진화)

글쓴이: 멀고느린구름


0. 작은 인디언, 붓다를 만나다.


  고등학교 1학년의 어느 여름. 나는 곧 있을 문예부의 문학기행을 위해 천성산 아래에 있는 내원사를 찾아갔다. 길을 잃고 헤매던 나는 우연히 이상한 숲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걷던 중 외딴 곳에 있는 정사를 한 곳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지율스님이 계셨다. 그 시절의 나는 중학교 적에 읽은 류시화 시인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감화되어 아메리카 원주민의 정신세계에 심취해 있었다. 집을 나간 어머니와 형의 빈자리를 술로 채우던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던 그 시절의 나는 내 속의 온갖 정신적인 방황을 자연 속의 생명들과 교감하고 명상하는 것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자칭 작은 인디언이었다. 


  신비로운 안개 숲의 끝에서 만난 지율스님은 내가 최초로 만난 스님이었다. 법정스님의 책을 몇 권 읽어보기는 했으나 스님을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어서, 나는 좀 적잖이 당황했었다. 그런 나를 지율스님께서는 따뜻하게 맞이해주셨고, 맛있는 밥까지 주셨다. 그리고 천성산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사람들이 너무 편리함과 개발만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말씀을 고조곤히 들려주셨다. 외딴 정사에서 홀로 천성산의 자연을 지키고 계시던 지율스님. 내가 처음으로 직접 만난 불교는 다행히도 매우 향기로운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진학 문제로 정신적 방황을 겪다가 다시 천성산을 찾았을 때도 스님은 변함없는 따스함으로 나를 맞아주셨다. 그 사이에 지율스님이 계신 정사로 가는 길이 포장되고, 개발은 점차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님 홀로 천성산의 생명들을 지키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나는 장차 스님처럼 사람과 자연이 교감하고, 서로를 보호해주는 문화, 사회를 만드는데 조그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대학생이 된 지금 나는 그때의 생각을 과연 잘 실천하고 있는지 반문해본다. 아직은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나는 아직 용기가 없었고, 신념에 대한 의지가 약했고, 게을렀다. 새만금을 지키기 위한 삼보일배와 천성산을 지키기 위한 운동에 모두 참여해서 활동했지만 사실 얼굴을 비추는 정도일 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러한 활동을 하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지율스님 같은 마음을 가진 이웃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싸이월드에 만든 클럽인 ‘인디언 하트(아메리카 원주민의 생각을 함께 나누는 곳)’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나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주 어릴 적에 심야에 하는 한 해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지구의 종말에 관한 것을 다룬 적이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는 21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인류의 미래가 두 갈래로 갈린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파괴와 전쟁의 세계로 가는가, 공존과 평화의 세계로 가는가의 갈림길. 21세기의 우리는 끊임없이 그 갈림길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갈 80년 정도, 혹은 인간수명의 연장으로 100년 정도?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러한 큰 세계사적 전환의 시기에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여긴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항상 그 물음에 고민을 하고 또 고민을 해본다. 또 다른 혁명을 일으킬 것인가. 무정부주의사회를 만들 것인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인가. 아니면 야심 차게 세계 대통일을 이룩할 것인가. 아니면 모두 미국 아래서 시다바리로 적당히 안주하며 살아갈 것인가. 맑스. 모택동. 체게바라. 많은 혁명가들이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고 스러져갔다. 그러나 그 이상이 우리의 현실에서 과연 이상답게 반짝이고 있는가. 그것은 정말 이상이었는가. 역사는 비정하다. 아름다웠던 청년 ‘체’ 가 미국의 자본주의에 의해 젊은이들의 아이돌 상품쯤으로 전락해버린 지금. 지구별에서 아주 조그만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젊은이인 나는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나는 시팅불, 싯다르타, 예수와 만나고 마음의 대화를 나누며 내가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계를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허망했으며, 세계를 바꾼 엘리트들은 모두 권력의지에 지배당하고 말았다. 세계를 바꾼다는 이상은 아름다웠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생명이 죽었고, 근본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혁명이 기존의 체제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이루어진 뒤 가야할 방향을 잃은 분노와 슬픔은 사람들 서로에게로 향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슬픔이 나아갈 또 다른 혁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현실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분명한 혁명은 바로 ‘마음의 혁명’ 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 ‘마음의 혁명’ 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이루어내는 모두 외부세계의 혁명은 별똥별처럼 환하게 빛나다 이내 스러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세계에 대한 비판의 눈을 그대로 나 자신을 향해 돌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세계의 모든 고통이 내 속에 이미 다 구현되어 있다는 것을. 나와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부시의 전쟁 놀음도 결국 모두 내 속에서 똑같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나 뿐 아니라 너, 당신, 우리 모두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똑같이 전쟁은 일어나고 있다. 바로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이 그것이다. 우리는 정의를 부르짖지만 정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정의란 것도 결국 ‘인간끼리’의 약속일뿐이다. 그것도 여성과 장애인, 하층계급을 배제한 강자들끼리의 약속. 인간강자끼리의 약속인 ‘정의’ 를 넘어선 그 무엇, ‘정의사회’ 이후의 어떤 사회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지향해야할 사회를 ‘사랑사회’ 로 명명하고자 한다. 정의는 수직적이지만 사랑은 수평적인 것이다. 그러한 ‘사랑사회’ 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의 ‘마음의 혁명’ 을 필요로 한다. 나는 패러다임 쉬프트와 같은 갑작스런 전환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류에게는 ‘느린혁명’ 이 필요하다. 천천히 천천히 하지만 깊게. 우리는 우리 마음의 사랑의 빛을 발견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 인류에게 붓다는 커다란 선물을 주고 있다. 붓다는 불교라는 종교를 넘어서 생각해도 좋다고 본다. 공자의 유교를 우리가 기독교식의 신을 신봉하는 서양종교(Religion)의 개념으로 여기지 않듯이, 불교 또한 붓다라는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집합쯤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예수가 그러하듯 우리 인류에게 종교를 넘어선 훌륭한 스승 중 한 분일뿐이다. 싯다르타는 평범한 인간이 마음의 혁명을 이루어내고,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증명한 증인이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싯다르타는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성인도 아닌 그저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니까. 우리는 모두 붓다가 될 가능성이 있고, 그러한 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번 글에서 불교의 개념을 차용하는 일은 가능하면 줄이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의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서서히 이루어 나아가야할 ‘마음의 혁명’ 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언어들은 싯다르타의 언어요, 그의 방편이었을 뿐이다. 나에게는 나의 언어가 있고, 나의 언어는 곧 내가 사는 이 나라, 이 시대의 언어이다. 과거의 언어는 끊임없이 ‘여기지금’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1), 언어 역시 우리 지금의 삶과 유리되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1. 잘 나가던 왕자가 동쪽으로 가출한 까닭은?


  카필라성(우리는 매우 호화로운 궁전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매주 작은 규모의 성이다2))의 왕자로서 나름대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던 싯다르타는 어째서 가출을 감행한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이 우리 인류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본다. 왜 이토록 화려하고 호화로운 과학문명을 이룩하고, 유토피아를 향해 돌진해가고 있는 인류가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자본주의문명, 과학문명, 가부장문명으로부터 가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


  싯다르타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성을 종종 뛰쳐나가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보면서 인간이란 존재가 태어나서 병들고, 늙고, 그리고 죽는다는 것을 보았다. 자기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인간인 한 해서야 병들고, 늙고, 죽는다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연의 진리인 것이다. 그것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인 것만 같았다. 싯다르타는 그 고통의 근원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 가출을, 아니 성출(城出)을 했다.


  무슨 말인지 감이 왔는가? 간단히 말해 우리의 화려함 이면에 감추어진 우리의 근원적인 고통을 행복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문명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수많은 놀이공원과 유원지, 극장 등이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서 파릇파릇한 연인들의 유희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연인들의 이별을 사랑으로 다시 바꾸어주는가.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끼어 영국이나 미국처럼 잘 살게 되면 가난한 사람도 덩달아서 잘 살게 되는가. 더 나아가 잘 먹고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행복한가. 절대적인 행복이 돈 속에 있는가. 물질적인 풍요, 과학문명의 유토피아 모델 속에 인류의 궁극적인 행복이 과연 내재해 있는가. 만약에 내재해 있다면, 그 행복에는 자연의 행복,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지구별의 행복도 함께 공존하는 것인가. 내가 퍼붓는 이 수많은 질문을 당신은 과연 모두 디펜스 해낼 수 있는가.


  아, 내가 조금 흥분한 모양이다. 마음을 다시 한 곳으로 모아보자. 심호흡을 하고. 가만히 자신의 호흡을 지켜보자. 그리고 다시 싯다르타 아저씨의 꽁무니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싯다르타는 성출을 한 뒤, 온갖 고행과 당시 첨단의 명상법으로 계속 수행을 하다가 결국 어느 한적한 나무그늘 아래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 깨달음이란 바로 ‘연기(緣起.paticcasamuppa'da3))’이다. 이 연기야 말로 불교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이 발견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니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니 따위의 물리학의 개념들을 중고등학교 과학시간에 졸면서라도 들어보았으니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싯다르타 당시에만 해도 저 발견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물리학의 법칙이


‘A에 힘(B)을 가하면 힘은 A에 대하여 운동에너지로 작용하여, A를 C의 거리만큼 움직이게 한다.’


즉 A+B=C4)와 같은 일대일의 ‘물리적’ 인과관계를 말한다면, 싯다르타의 인과론은 보다 중층적인 인과를 말한다. 싯다르타의 인과론의 대표격으로 12연기를 대개 말하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12연기는 하나의 시범 케이스일 뿐 진정한 싯다르타의 인과론은 아니라고 본다5). 그와 같이 도식적으로 1:1 대응의 인과를 말하는 것이 연기가 아니다. 하나의 존재가 있다(유-有)는 사실에도 단순히 태어남(생-生)이란 원인 뿐 아니라, 적정한 기후, 음식, 사람과의 관계, 지구 중력의 적정한 정도 등 다양한 복합적인 원인이 있어서 하나의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싯다르타의 인과론은 물리학의 1:1 대응의 인과론보다 더 중층적인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싯다르타의 인과론을 이와 같이 이해할 때만 또한 불교의 무아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내가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아(無我)니, 공(空)이니 하는 불교의 개념들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불교법사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계속 싯다르타의 뒤를 밟아보자. 싯다르타의 인과론은 또 한 가지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생성의 인과6)와 함께소멸의 인과 7)도 되짚어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명진이는 손예진이 예쁘기(A) 때문에 좋아한다(B).’


  이와 같은 명제가 있을 때 명진이가 손예진을 좋아하는 원인은 ‘예쁘기’ 때문이다. 이것은 

A가 있기 때문에 B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생성의 인과라 한다. 물리학의 법칙은 이것을 발견하는 것에서 멈춘다.(물론 그 후에 이를 응용하는 다양한 공학, 의학들에 의해 더 나아간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반대를 생각한다. 손예진이 예쁘지 않다면 명진이는 손예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A가 멸하면 B도 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멸의 인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자.


2) ‘명진이는 손예진을 좋아하는데(A), 손예진은 명진이를 좋아하지 않아(B) 괴롭다(C).’


  이 명제는 위의 명제보다 조금 더 복잡해 보인다. 우선 생성의 인과를 보자. 결론은 명진이의 괴로움이다. 그 괴로움을 생성시킨 원인은 두 가지이다. 즉 A와 B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A의 원인이 있음을 놓치고, 손예진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괴롭다는 사실에만 주목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연기적 사유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언급하자면 싯다르타의 인과는 1:1이 아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연기의 실천적 방법을 이야기하며 좀 더 다루겠다. 자, 그럼 우리가 아이돌 스타에 눈 먼 불쌍한 명진이의 괴로움(C)을 덜어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손예진이 명진이를 좋아하게 만들거나, 명진이가 손예진을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둘 중 하나일까. 손예진이 아무리 나이가 같다고 해도 일반인인 명진이를 좋아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그냥 쌈박하게 “명진아! 네가 포기하렴!” 하고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어야 할 것인가. 자자, 그렇게 성급할 건 없다.


  우리는 싯다르타의 인과론을 좀 더 철저하게 현실에 적용하는 여유를 가져야 하겠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명한 상담자라면 명진이에게 손예진을 왜 좋아하는지 물어볼 것이다. 그러면 명진이는 1)번 명제처럼 손예진이 ‘예뻐서요’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뒤 온화한 염화미소를 지으며 그럼 손예진은 왜 명진이를 좋아하지 않을까? 라고 친절하게 물어보자. 그러면 명진이는 눈물을 머금으며 ‘난 안 예쁘니까요.’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건 좀 농담이고 좀더 깊이 있는 상담자라면 손예진의 어디가 예쁜지, 명진이에게 있어서 예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계속 캐물어 갈 것이다. 그 뒤에 그렇다면 명진이는 손예진의 예쁘다는 것 말고 다른 것들은 전혀 고려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 물어보고, 손예진이 스케쥴 때문에 바빠서 한 달에 한 번 밖에 못나더라도 손예진과 사귀고 싶은지, 손예진이 떠도는 소문처럼 괴팍한 상대라도 괜찮은지, 그 모든 게 ‘정말로’ 예쁘다는 한 가지 이유로 커버될 수 있는 것인지, 명진이의 과거의 경험과 지금의 안이비설신의 육식, 마나식, 아뢰야식의 체계까지를 끌어내 보일 것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명진이는 자기의 손예진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보고(正見)8), 보다 현실적인 대상으로 자기의 사랑의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싯다르타의 인과론의 목적은 이론적으로 세계를 깨닫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바대로 고치는 일에 있다. 이를 9)의학적인 과정으로 비유해 본다면 싯다르타의 연기의 목적은 진단이 아니라 치유에 있다는 것이다. 자 여세를 몰아서 다음 논의로 넘어가 보자.


  싯다르타는 그럼 연기를 깨달은 것으로 끝났는가. 그랬다면 싯다르타의 사상은 2000년을 넘게 이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싯다르타의 더욱 위대한 점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는 것에 있다. 불교 경전을 들여다보면 그 실천의 방법을 육바라밀이니, 팔정도(八正道)10)니, 삽십칠조도법이니 하는 말로 풀어내고 있지만 그러한 내용을 불교도가 아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불교의 교리 개념들이 지향하고 있는 실천의 요점은 바로 중도(中道)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도라는 것을 매우 서양적인 관점에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수행을 했다는 스님들조차도 중도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한다. 우리는 중도를 ‘싯다르타가 쾌락과 금욕의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했다’ 쯤으로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다. 허나 이런 정도의 중도라면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다음과 같이 중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용(中庸)11)은 시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다 적용되는 원칙이다. 은유나 방언이나 기타 다른 말도 부적당하게 그리고 웃음을 자아낼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적당하게 사용하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서사시의 한 행을 일상어로 바꾸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적당하게 사용하면’ 이라는 용어를 굵게 표시해둔 것을 보고 작자의 음험한 음모를 느낀 분도 있을 것이다. 적당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과 저것 중간의 적당한 정도로서의 중용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중도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적당주의의 하나일 뿐인가. 우리는 서양의 사상에 너무나 물든 나머지 동양의 중(中) 이라는 개념을 일직선상의 중간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서양의 직선사관 등 매우 복잡한 철학적 문제들과 함께 맞물려 있는 문제이다. 자, 이제 말을 그만 빙빙 돌리고 속 시원하게 내 생각을 말하겠다. 다음 그림을 봐주시기 바란다.


<서양의 중도>


                               

                         ↓

       처음(극)--------------->끝(극)




<동양, 붓다의 중도>

 



    위의 그림을 보면 우리는 명확하게 붓다가 말하는 중도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싯다르타의 사고에서 ‘극’ 이라는 개념은 없다. 카필라성에서의 쾌락도, 고행 속에서의 금욕도 모두 똑같은 원 속의 구성요소이지 ‘양극단’이 아닌 것이다! 싯다르타의 사고구조에서 모든 극은 다시 또 다른 극과 만나며 그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한 것을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했다는 식의 케케묵은 서양적 사고모델로 설명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것은 싯다르타가 애써 깨달은 연기와 그 실천으로서의 중도를 매우 가치 없는 사고로 퇴보시키는 짓이다. 불교는 적당주의가 아니다! 불교는 전관(全觀)12)주의다! 자신을 어느 쪽에 치우침이 없는 세상과 사건, 사유의 중심에 두고, 모든 가능성, 모든 조건을 두루 살핀 후에 알맞은 바른 길(正道)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중이 ‘중간(中間)’이라면, 동양의 중은 ‘중심(中心)’이다. 중심이란 원이나 구에서 가장자리의 각 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을 뜻한다. 즉 모든 지점, 사유, 사건으로부터 같은 관조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곧 중도의 도다.


  싯다르타는 삶의 본질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성출을 했고, 연기를 깨닫고, 중도의 방법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그에게는 외로움이 엄습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함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 싯다르타의 모습인가. 아무리 지고의 성인이라고 한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문제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기에게 불현듯 찾아온 외로움을 싯다르타는 다시 자기의 인과론을 이용해 깊게 분석해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외로움의 고를 없애기 위한 방법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경전 속에서는, 싯다르타의 마음 속에 찾아온 천사와 악마의 싸움13)에서 천사가 승리를 하여 결국 싯다르타가 자기의 법을 타인에게 전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설화를 싯다르타의 ‘교조’ 로서의 위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비유라고 본다. 싯다르타는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고14), 그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타적인 삶을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상대방으로부터 단절을 느끼고, 외로워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근원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느끼는 것, 내가 보고 있는 것을 타인이 나와 똑같이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 존재의 고독의 본질이 있다. 싯다르타 역시 그러한 고독의 본질을 맛보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아~ 사람들한테 아무리 말해봤자. 내 말을 몰라줄 거야. 그러니 나는 차라리 혼자 고독한 구도의 길을 계속 걷겠노라!”


이렇게 소심하게(?) 고민하던 싯다르타는 다시 최후의 다르마를 깨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야 말로 불교의 목샤(Moksha)15)요 니르바나(Nirvana)라고 본다. 붓다가 마지막으로 발견한 그것은 바로, 자비요. 곧 ‘사랑’이다.   





2.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때는 2001년의 어느 한 적한 가을날. 강변역의 CGV에서 영화 ‘봄날은 간다’ 를 보다가 이 대사가 상우(유지태분)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내 눈에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그래, 상우야!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단 말이니!!!’


어렸던 나는 사랑이 왜 변하는지, 변해가는 마음을 붙잡아둘 순 없는 것인지... 사랑의 변화, 세월의 변화, 사람의 변화가 모두 야속하기만 했다. 변해가는 것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흩어지는 것을 다시 모으려고 애썼던 시절들이 파노라마처럼 지금 내 마음 속에 펼쳐진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에 있는 선과 현대 수업시간에 덧없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지금 덧없는 게 무엇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순간 내 마음 속에 ‘사랑’ 이라는 단어가 슬며시 떠올랐다. 그러나 소리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사랑이 덧없다’는 말은 너무도 박제된 말이어서, 내뱉는 순간 내가 의미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의미는 너무도 달라질 것을 알았던 까닭이었다. 나의 귀중한 깨달음이 코미디가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2001년에 ‘사랑’ 에 관한 소설을 한 편 쓴 적이 있었다. 운이 좋아 학교에서 주는 그럴듯한 상도 받았다.(은근한 자랑임) 그 소설의 제목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습니다.’ 그때 내가 해본 사랑은 짝사랑 세 번이 고작이었다. 그런 아이가 뭘 안다고 용감하게도 사랑에 대한 소설을 썼던 것일까. 지금 되짚어 봐도 나는 무식해서 용감했다. 지금 그 소설을 읽으면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때의 내가 사랑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그때의 나는 사랑을 ‘믿음과 기다림’ 이라고 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상대방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여겼다. 물론 사랑의 바탕에 신뢰와 인내가 있어야 하는 것은 지금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그리고 쉬운 일로 생각했다. 사랑한다면 그래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사랑한다’ 는 게 무슨 말인지는 전혀 몰랐다. 그 후 나는 두 번의 연애를 거쳐 지금은 혼자다.


  두 번의 연애를 거치면서 나는 많이 변했고, 많이 깨달았고,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나는 2001년에 ‘잃어버린 사랑을 찾습니다’ 를 쓰던 문학소년에서 반 뼘쯤은 더 자랐다. 영화 ‘봄날은 간다’ 의 마지막 장면, 갈밭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여린 미소를 짓던 상우의 그 기분이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아, 그래. 사랑은 변하는구나...’


  연애를 하던 시절에 나는 많이 서투르고, 본바탕도 좀 못된 구석이 많아 상대방을 많이 괴롭혔다. 참 못할 짓을 많이 했다는 반성이 든다. 내 딴에는 애를 쓴다고 여러 가지 사랑에 관련한 서적을 탐독해서 실제로 적용도 해보고,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결과는 그다지 신통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상대방이 책에 쓰인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노력을 덜 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는 모든 죄를 상대방에게 전가시키는 천하의 불한당 짓을 자행했던 것이다. 나는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애썼다. 마치 상대방만 바뀌면 우리의 관계가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부질없고 어리석고 비겁한 짓이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 는 엘리트 지식인의 독단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좁은 소견에 빠져 1:1 의 인과론을 펼치고 있었다. 이것은 이것 때문, 저것은 저것 때문. 하지만 모든 고통의 원인은 근원적으로 나 자신에게 있었다.


  나는 초기에 ‘관계를 좋게 변화시켜야지’ 라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곧 그것이 ‘상대방을 좋게 변화시켜야지’ 라는 의도로 변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착각 속에 빠져든 나머지,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를 좋게 바꿔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것이 상대방을 좋게 바꿔야지라고 생각이 바뀌는 순간, 나는 상대방이 좋지 않다는 착각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중생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에리히 프롬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말16)을 근본주의 신자처럼 문자 그대로 따랐고, 존 그레이의 책17)을 시리즈별로 열심히도 읽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더 큰 화근이었다. 나는 책 속의 이상적인 상황에 붙들린 나머지 현실과의 괴리를 점점 더 느끼고, 현실의 연애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나는 의기양양했고,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몰랐다.


  붓다의 말 그대로. 무명(無明)과 무지(無知)가 모든 고(苦)를 낳았다. 나의 오류를 연기적으로 사유한다면 아래와 같이 도식화 할 수 있다.


이별-연애의 고통-변화의 강요-상대방에게 책임전가-나의 자만-잘못된 앎-무지


생성인과에 따르자면 무지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어 이별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고, 소멸인과를 따르자면 무지를 해결해야만 결과인 이별도 소멸한다. 그렇다면 나의 ‘무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대체 무얼 몰랐을까.


  자,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싯다르타 아저씨에게 한 수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싯다르타의 ‘사랑’ 이라는 것의 정체에 대한 한 번 생각해보자. 앞에서 나는 사람의 외로움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모른다.’ 라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사랑의 목적은 인류평화니 어쩌구 하는 그런 것보다, 가장 1차적인 목적은 외로움의 치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외로움을 치유하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첫눈에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때의 느낌을 잘 살펴보자. 우리는 마음 속에 처음 만난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 멋있다! 예쁘다! 돈이 많다! 이런 것을 떠올린다면, 사랑에 ‘빠졌다.’ 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인근 국문과 친구에게 물어보도록 하시라. 멋있다, 예쁘다 이런 말은 사랑에 빠졌다 보다는 ‘뿅갔다!’ 정도가 어울릴 듯 하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이미 사랑에 돌입한 상태다. 반한 정도가 아니라는 의미다. 밤마다 그 사람이 머리 속에 아롱아롱 떠오르고, 그 사람의 목소리만 떠올려도 가슴이 뛰곤 한다. 아아 로미오! 그대의 이름은 어찌하여 로미오인가요! 단 하루 만에 사랑에 빠져 월담에, 키스까지 겁 없이 했던 그 두 청춘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사랑에 빠진 상태. 그 마음 속에는 이런 감탄사가 내재해 있다.


“아! 이 사람은 정말 나를 이해해주는구나! 나를 알아주는구나!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구나!”


바로 이것이다. 정열적인 사랑이 외로움을 치유하는 방법은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잘 안다’, ‘그 사람만이 참 나를 알아준다.’ 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왜냐면 로미오와 쥴리엣은 서로의 이름과 서로가 예쁘고 잘생겼다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실질적인 앎을 뛰어넘어 그들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정말 착각일까? 사실 또 그렇지는 않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인간은 사실 아무나 사랑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정말 우리는 ‘아무나’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싫은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 중에서도 사랑의 대상이 있고, 우정의 대상이 있고... 이렇게 많은 세부 항목들이 있는데 그것을 다 무시하고 아무나 사랑한다?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복잡한 질문을 한꺼번에 해버린 까닭에 대해 이제 이야기를 하겠다. 우리의 뇌는 세 가지의 뇌로 나뉘어 진다. 파충류의 뇌, 변연계, 신피질. 이 세가지이다18). 이 중에 우리의 감성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뇌가 바로 ‘변연계’ 이다. 이 변연계는 직관적인 전기신호로 외부의 사물을 파악하고, 해석을 해서 신피질에 명령을 내리고, 신피질은 그러한 명령에 따라 우리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19). 우리가 말하는 ‘사랑’ 의 감정도 바로 이 변연계로부터 일어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일컬어 ‘변연계 공명’ 이라고 한다. 이 변연계는 신피질과 항상 상호 교신을 하며 정보를 주고받는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보겠다.

 

  명진이가 길을 걷다가 데뷔하기 전의 손예진을 보고 첫 눈에 반해 사랑을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명진이와 손예진 사이에는 변연계 공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전기가 통한 상황이다. 이 변연계 공명은 신피질에 들어있는 우리의 기억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까 명진이의 신피질 속에 영양갱을 좋아한다는 매니악한 성향이 기억되어 있다고 치자.(사실 진짜로 좋아한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손예진이 신피질에도 역시 영양갱을 좋아한다는 매니악한 성향이 기억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때 길을 걷다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신피질에서 뛰놀던 영양갱이 변연계를 통해 서로에게로 전기빔처럼 발사된다! 이 순간 둘은 서로가 영양갱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된다20). (물론 둘은 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이것은 무의식=아뢰야식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영양갱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것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변연계 공명에 대해 이해가 되는가. 자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에리히 프롬의 실수를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아무나 사랑하는 게 아니라, 변연계 공명을 일으키는 사람만 사랑한다. 좀 더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전기가 통하는, 마음이 맞는 사람만 사랑한다. 이거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닌가? 이런 얘길 하려고 어려운 뇌과학까지 끌어들였단 말인가. 자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첫 번째 물음에도 한 번 답을 해보자.


  로미오와 쥴리엣의 불타는 사랑은 정말 착각인가? 대답은 ‘NO’ 다. 둘은 서로를 정말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 그것이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인 것이다. 둘은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변연계 주파수가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불타는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인연이 있었던 까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유식(唯識)학21)에 의거하자면 그 둘의 아뢰야식이 이끌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아아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복잡해진다. 대체 우리는 사랑을 안단 말인가 모른단 말인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착각에 빠진 것일 뿐이라는 말인가. 간단히 대답을 하자면 우리는 사랑을 알았다가 다시 무지에 빠진다. 그것이 모든 이별의 사유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분)는 사랑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상우는 사랑이 변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면 은수는 사랑을 알고 상우는 사랑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다. 은수도 상우도 사랑의 한 면만을 보았을 뿐이다. 사랑은 변했다가 다시 변한다. 그리고 또 다시 변한다. 은수는 사랑의 한 번의 변화만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이별이 다시 만남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내가 싫어하던 것을 내가 언젠가 다시 좋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녀는 몰랐다. 은수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영화에서 은수는 상우와 헤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상우를 찾아 함께 있자고 말한다.) 상우는 또 다른 은수가 된다(상우는 또 다른 은수가 되어 사랑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사랑을 피한다). 그렇게 상우와 은수는 엇갈림의 굴레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 상우의 웃음은 무엇일까. 상우는 은수가 자기에 돌아온 것을 보고, 아아... 그렇구나. 라고 염화미소를 짓는다.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변한 사랑은 다시 한 번 또 변한다는 것을 상우는 깨닫는 것이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실로 각자(覺者), 붓다가 된 것이다! 조금은 슬프지만 그는 흐뭇한 마음으로 여름날을 맞이했을 것 같다.


  사랑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랑에는 실체가 없다. 사랑은 좀 심하게 말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없다. 사랑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다만 그때그때 우리 마음의 흔들림과 엇갈림 그리고 일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한 마음의 순간순간의 변화를 우리는 사랑이라는 성긴 그물로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사랑을 알았다가 무지에 빠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이라는 정의는 필요 없다. 우리는 그냥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을 느낀다. 완전한 일체감 행복감을 만끽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월담을 한다. 그리고 그 완전한 일체감과 행복감을 사랑이라는 그물로 붙잡아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실체는 없기 때문에 좀처럼 그물에 잡힐래야 잡힐 수가 없다. 거기에서 사랑의 아픔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러한 아픔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의식적인 차원에서 상대방과 나의 차이점들을 발견해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상대방과 다르다는 착각, 상대방은 나를 모른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다시 외로워진다. 그리고 이별한다. 물론 모든 상황이 이러한 도식에 꼭 부합하지는 않을 수 있다. 허나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리 몰래 벌어지고 있는 사건은 대개 이러한 유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그럼 다시 물어보자. 사랑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너를 알고, 네가 나를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부정하지만, 우리의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 말로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갑자기 이야기의 범위가 너무 철학적으로 흘러서 당황해 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 아프지만 다시 ‘변연계 공명’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우리 머리 속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문화적으로 형성되며, 또 이 지구별이라는 환경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는 그냥 무심코 거리를 걸으면서도 수많은 지구의 사람과 전기적인 신호를 주고받으며 ‘변연계 공명’을 일으킨다. 이러한 변연계 공명이 지속되면 변연계 동조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게 되는 현상이다. 흔히 사이좋은 부부를 보면 좋아하는 드라마도 똑같고, 말투도 똑같고, 옷 입는 것도 똑같다. 이것이 바로 변연계 동조를 통해 두 사람의 기억이 똑 같아진 것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한다라는 감성의 기억까지 같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좋은 부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마음의 회로가 서로를 향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은 끊임없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자기의 현재 정체성을 디자인해 낸다. 이들 사이에는 이미 너와 나의 명백한 경계가 없다. 이들의 직업과 과거가 다를지는 몰라도, 그들의 현재 자체는 거의 일치한다. 이 변연계 공명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동일한경지에 이른 이들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들은 혼자라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다. 


  싯다르타는 이미 오랜 명상을 통해 나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외로움을 느꼈을 때, 이타적인 발상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나중에 제자들에게 자비를 행하라는 아름다운 말을 남길 수 있었다. 우리는 예수의 아름다운 말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22)


예수는 진정 연기의 지혜를 깨우친 분인 것이다. 우리가 원수라고,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곧 친구가 되고 선이 될 수 있다. 또한 나 역시 그 원수의 입장에서는 원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남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원수와 나, 나와 원수는 같은 동일인물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느님은 원수에게도 인자하시다. 원수와 내가 다르지 않기에, 원수 역시 하느님의 어린양이니까.


  우리는 신앙적인 예수를 넘어서, 예수의 이러한 통찰적인 깊이 있는 사유를 알아야 한다.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대속자 예수상을 믿는 것으로, 우리에게 하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되려 예수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바꾸려고 했던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 잘못된 세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인간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예수가 통찰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세계와 사람과 생명을 관조적으로 전관(全觀)하고, ‘사랑’ 해야 한다.



3. 욕심 없이 사랑하기, 현명하게 사랑하기, 경계 없이 사랑하기.


  눈을 감자. 천천히 심호흡. 호흡을 고요히 바라보자. 그리고 서서히 서서히 마음속에 사랑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분홍빛의 반짝이는 하트를 떠올려도 좋고, 연인을 떠올려도 좋다. 가슴이 따뜻해지면 그 느낌을 그대로 바라보자. 그 느낌이 스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음미하며 느끼자. 그 느낌을 유지하고 싶은 만큼 유지하다가 서서히 눈을 뜨자. 이상 오늘의 명상의 시간.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우리가 고도의 지성으로 싯다르타의 인과론을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현상의 실체를 탐구해서 아 이거구나! 라고 알아냈다 해도, 그것은 머리로 안 것에 그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해서 사실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구나~ 라고 알았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방해 전파를 보내 너는 그 애를 싫어하는 거야! 당장 헤어져! 라고 외친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아니야 아니야! 사실은 그 애를 좋아하는 거란 말이야! 라고 처절한 전투를 벌여야 할까?


  싯다르타는 고맙게도 우리에게 그런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주었다. 우리가 흔히 명상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개신교와 일부 카톨릭에서는 명상이 불교의 것이라 하여 금기로 삼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아주 무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싯다르타가 물론 명상을 고도의 경지로(사실 그것도 싯다르타가 개발했다고 하기 보다는 후대의 제자들이 더 가다듬은 측면이 많다.)까지 확장시키긴 했다. 그렇지만 명상이라는 수행법, 즉 눈을 감고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법은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것이다. 힌두교와 시크교,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모두에 이 명상의 전통은 공존한다. 기독교에서 흔히 하는 ‘기도’를 요즘의 기독교인들은 무슨 자기 소원을 비는 기복신앙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그 기도야말로 기독교의 선(禪)이다.23) 챈팅(Chanting.독송)이라고 하면 보통 ‘나무아미타아불~’ 뭐 이런 식의 불교 독송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는 사실 기독교의 용어이다. 기독교의 원래 기도는 성경의 구절 중에 아름다운 구절을 따서 그것을 계속 반복하며, 신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는 행위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인은 모든 번뇌를 잊고 그 구절 하나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명상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한 기도의 시원을 모르고 지금의 기독교는 통음기도라는 새로운 기도법까지 만들어내며, 기복신앙으로 퇴보하고 있다.24)


  좀 옆길로 샜지만 나는 종교를 초월해서 우리는 모두 명상을 해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티븐 배철러는 ‘성찰적 명상은 생각을 느낌의 언어로 바꾸는 하나의 방법이다.25)’ 라고 말하고 있다. 스티븐 배철러는 <붓다는 없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지나치게 불교를 이성주의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지만, 위와 같은 말은 정말로 탁월한 말이다.26) (더불어 스스로 이미 자신의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훌륭하다.) 내가 다시 한 번 해석을 하자면 명상이란 것은 이성을 감성으로 번역시켜주는 운동(sport)이다. 더 깊이 있게 말하자면 의식의 말을 무의식으로 전달해주는 일인 것이다.


  오랜 명상을 통해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대화의 채널이 확보되면 우리는 무의식 차원에서 발생되는 일을 알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 통제를 수행하는 것은 유식(唯識)에서 찰나식(자각)27)이라고 하는 녀석이다. 이 찰나식은 처음에는 우리의 의식이랑 싸우는 일밖에 못한다.(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라고 할 때는 욕망하는 나가 있고, 그것을 통제하려는 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통제하려는 ‘나’ 가 곧 찰나식이다.) 그러나 오랜 명상을 통해 찰나식이 확장되면 자기의 무의식(아뢰야식)까지 통제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때에는 너와 나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어 모든 만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뇌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명상을 통해 찰나식이 성장하고, 이 찰나식을 통해 우리가 변연계 공명을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고, 또 간단하게 변연계를 제어해서 그것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좋아하도록 변연계 공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그러한 원리에 의해서 모든 만물에 대한 무한한 자비가 솟아나올 수 있다.28)


  처음에 나는 ‘마음의 혁명’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혁명’ 이라는 말의 무게처럼,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의 혁명은 강요될 수 없다. 다만 권장될 수 있을 뿐. 그딴 복잡한 것 신경 안 쓰고 그까이꺼 머 대충 그냥 살다가 가면 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의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이라는 말을 생각하려 한다면, 이 마음혁명이라는 명제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자연을 바꾸어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냈고, 그 문명과 문화를 수도 없이 뒤바꾸어 지금의 현실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현재는 과연 아름다운가?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외부의 조건이 아닌 스스로를 바꾸어 보려고 전 국가, 전 사회가 노력한 일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문명인이라는 자들은 스스로의 마음을 바꾸어 평화로운 사회와 자연과의 조화, 생명과의 조화를 추구하고 살았던, 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 티벳의 선량한 민중들을 학살하는 일에 앞장섰다. 21세기의 백년.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그려진 두 갈래 길에서 우리는 멸망으로 갈 것인가 사랑과 평화로 나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종교로, 경제적 이권으로 서로 전쟁을 벌이고, 국가간의 음험한 암투를 벌이고 있다. 인간은 왜 자꾸 싸우는가. 인간은 왜 자꾸만 전쟁의 역사를 반복하는가.29)  내가 가장 존경하는 소설가인 황순원 선생님은 당신의 작품 <일월>에서 말씀하신다.


“사람은 외롭게 마련야. 그래서 역사가 이뤄지구 사람을 죽이구 또 죽구 하는 게 아닐까. 본시 인간이, 그리구 땅과 하늘이 피를 요구하구 있다구 봐. 어떤 외롬에서 벗어나려구 말야. 그 피란 반드시 붉은 색의 유형의 것만을 말하는 건 아냐. 보이지 않는 가슴속에 흐르는 피를 의미할 수두 있지.”30)


  인간의 외로움. 인간의 마음 속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외로움의 피가 싸움을 요구한다. 호전적인 행위, 격한 움직임은 모두 자기를 타인 앞에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에 다름 아니다. 나를 알아주세요! 나를 알아주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 라고 애타게 외치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100년 동안의 혁명을 꿈꾸자. 그 혁명의 이상은 사랑사회이고, 그 혁명의 모토는 느린혁명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다.


욕심없이 사랑하기.

현명하게 사랑하기.

경계없이 사랑하기.


  욕심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뿐이다. 그리고 의식적인 차원에서 상대방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방의 변화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 역시 내가 원하는 세계만이 정답이라는 착각에서 나온 욕망이다. 당신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떠나든지, 당신이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맞추어라. 내가 사랑받고 싶은 만큼 상대를 더 사랑하라. 그리고 명심하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31)

 

  현명하게 사랑하기. 행동하기 전에 깊이 명상하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나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행동하라. 꾸준히 자기의 마음을 살펴서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근본적으로 나와 너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산목숨으로 있기 위해 어떠한 조건들이 지금 이 순간 이 0.0001초도 안 되는 순간에도 동원되고 있는지 싯다르타의 인과론으로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수많은 원인들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일어나고 있는지 깊게 생각하고 감사해하자.

  그리고 사랑이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게 사랑이고, 저건 사랑이 아니야 라는 착각에서 자유로워 져야 한다. 당신이 자기가 아닌 타인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큰 틀에서 사랑이다. 사랑은 연인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특수한 것도 아니고, 사랑은 개개인의 마음을 넘어서 있는 그 무엇이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나를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증오로 바꿀 필요는 없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 변화를 억지로 붙잡는 그물이 아니다. 사랑의 마음이란 것은 한 대상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눈을 돌리면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변연계의 창들이 있다. 그들이 모두 사랑받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 중에 당신이 마음과 공명을 일으킬 사람들이 반드시 또 있다. 그러나 당신이 마음의 창을 닫아두고 있을 뿐이다. 마음의 창을 닫고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갈 곳을 잃은 사랑이 자기의 어둠 속에 숨어버린 것일 뿐이다.

  현명한 사랑은 마음의 창을 크게 열어놓은 사랑이다. 그 사랑에는 분별이 없다. 현명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과 생명에게서 사랑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을 틔워낼 줄 안다. 그리고 자기가 틔워낸 것에 책임을 지되 집착하지 않을 줄 안다. 나는 그것이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길 줄 알 때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대상은 언젠가는 변화하고 스러진다. 그 고정된 대상을 사랑한다면 그 대상이 변하거나 스러짐과 동시에 사랑도 변하고 스러진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하고 충만한 그 마음을 소중히 하고, 가꾸어 나가려 하는 자세이다. 그 마음의 형태만 유지될 수 있다면 그 사랑이 향하는 대상이 어떠한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바뀌든 나와 너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그 하나의 끈으로 변화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


  경계없이 사랑하기. 우리는 모든 경계를 넘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직업, 사회적 위치, 신분, 종교, 인종의 경계를 월담해서 쥴리엣과 로미오처럼 찐한 키쓰를 날릴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인간과 다른 생명, 짐승, 화초, 바람, 별, 해, 공기 이 모든 것과도 아름다운 성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경계짓고, 차이를 강조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100년 동안의 마음혁명을 통해 천천히 너와 나, 나와 자연, 나와 다른 생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가야 할 것이다.

   

  이 마음의 혁명에는 싯다르타도, 예수도, 마호메트도, 테레사수녀도, 공자도, 소피아32)도, 가이아33)도 모두 스폰서로 뒤를 받쳐주고 있다. 든든하지 않은가? 허황된 이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한 걸음씩 100년 동안 걷다보면 어느 새 지구를 한 바퀴 돌 수도 있지 않겠는가. 100년 동안의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우리 인류는 이 지구별에 출현한 이래로 비로소 진정한 한 번의 진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붓다가 약 2500년 전쯤에 발견한 ‘사랑’ 을 이제 새롭게 종교를 넘어선 우리의 혁명운동으로 부활시킬 때가 왔다. 지금 여기 바로 이 21세기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이다. 



-참고도서-


<불교개론> 마스타니 후미오. 현암사.

<붓다는 없다> 스티븐 배철러. 이론과 실천.

<더 오래된 과학, 마음-달라이라마와 하버드교수들의 대화> 허버트 밴슨 외. 여시아문.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1,2,3> 도올 김용옥. 통나무.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도올 김용옥. 통나무.

<금강경 강해> 도올 김용옥. 통나무.

<절차탁마대기만성> 도올 김용옥. 통나무.

<도올 논어 1,2,3> 도올 김용옥. 통나무.

<인도에 대하여> 이지수. 통나무.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 이승환. 고려대학교출판부.

<불교. 지혜의 원천>에드워드 콘즈. 경서원.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유식 30송> 서광스님. 불광출판부.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서광스님. 불광출판부.

<숫타니 파타> 법정 옮김. 이레.

<레프 톨스토이 편역 요약복음서와 나그 함마디 출토 도마목음서> 염낙준 역. 홍익재.

<공동번역 성서>KBS

<예수의 생애> 마크털리. 문학동네.

<여성과 종교> D.L 카모디. 서광사.

<미래에서 온 편지> 현경. 열림원.

<우리 속에 있는 지혜의 여신들> 진 시노다 볼린. 또하나의문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웅진.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문예출판사

<소유냐 삶이냐> 에리히 프롬. 홍성사.

<사랑을 위한 과학> 토머스 루이스 외. 사이언스북스.

<전쟁의 역사> 버나드 로 몽고메리. 책세상.

<일월> 황순원. 문학과 지성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존 그레이. 친구미디어.





1) 마치 새 술을 헌 가죽부대에 넣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억지로 넣으면 부대는 찢어지고, 술은 흘러나올 것입니다.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넣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누가복음.5:37~38)


2) ‘카필라 성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동서 400m, 남북 50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성이다. 기껏해야 순천 벌교 낙안성보다 조금 더 큰 규모일 뿐이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2> 김용옥 지음. 457P 


3) ‘말미암아’ 緣(Patica=grounded)라는 말과 ‘일어나는 것’ 起(samuppa'da=arising)이라는 말이 결합된 단어이며, 어떤 조건에 말미암은 발생이라는 정도의 뜻.

   -<불교개론>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27P


4) 물론 실제로 거리인 C를 구하는 공식은 ‘거리(C)=시간 x 속력’ 이지만 물체 A에 힘(B)를 더하면 C만큼의 물리적 ‘변화’가 생긴다는 의미로 위와 같은 단순한 도식을 취했다.


5) 미혹의 인과를 열둘로 나눈 것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불교개론>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80p


6) 유전연기(流轉緣起) 혹은 순관(順觀)


7) 환멸연기(還滅緣起) 혹은 역관(逆觀)


8) 팔정도의 수행 방법 중 첫 번째에 해당


9) <달라이라마와 도올이 만남1> 203p 부터 시작되는 ‘진단과 치료’ 라는 도올선생님의 사유를 차용한 것임.


10) 팔정도는 삼십칠조도법(三十七助道法)-서른일곱 가지의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법-의 항목에 포함되고 있다. 미루어 볼 때 팔정도가 보다 근본적인 불교의 실천강령이고, 다른 항목들이 부파불교 이후 추가되면서 삼십칠 개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팔정도를 제외한 항목으로는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定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분(七覺分)이 있다.


11) <시학(詩學)> 아리스토텔레스. 문예출판사. 131p


12) 공자 역시 전관을 역설했다. 공자는 중용에 대해서 시중(時中)을 설했는데, 이는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들을 전관하여 그때그때에 ‘알맞은’ 말, 알맞은 예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적당주의와는 전혀 다른 철학적 자세이다.


13) 범천(=브라흐만). 마음 속에서 갈등하는 천사와 악마의 대립을 우리가 가장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은 디즈니의 명작만화 도날드 덕에서 이다. 이 도날드 덕은 크리스챤인데, 우리는 흔히 기독교로부터 이 천사와 악마의 개념이 도출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유일신, 천사, 악마의 개념은 모두 B.C 6세기 무렵 페르시아의 아리안 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아리안 족이 인도와 희랍,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천사와 악마, 그리고 유일신의 개념들이 생성된 것이다.


14) 물론 이 외로움이 우리가 흔히 밤이면 밤마다 외로워~ 라고 하는 그런 성질의 외로움은 아닐 것이다. 싯다르타는 근원적인 인간의 홀로됨,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생명의 관계가 서로 잘 연결되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근원적인 단절의 슬픔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무지로 인한 고독이다.


15) 인도의 여러 종교에 공통적인 요소로서 윤회로부터의 벗어남. 즉 해탈(=구원)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16)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문예출판사>이라는 책에서는 ‘사랑’에 관해 다양한 측면에서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하고 있다. 프롬은 이 책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 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하고 있다.


17) 존 그레이는 이제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베스트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의 저자이다. 존 그레이는 이 책 말고도 각각 상황에 알맞은 구체화된 사랑의 방법과 이해를 다룬 책들을 시리즈로 출간했다.


18) 이 용어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사랑을 위한 과학. 토머스 루이스. 사이언스북스>에서 사용된 개념을 차용했다.


19) <사랑을 위한 과학. 토머스 루이스. 사이언스북스> 111p ‘사랑의 해부-슬픔은 전기적이다’ 부분 참조.


20) 눈은 변연계의 창이다. 실제로 변연계가 눈으로부터 뒤쪽으로 일직선상으로 당겨진 부위에 있다.


21) 400~800년경 바수반두에 의해 만들어진 대승계열의 경전. 불교의 윤회와 자비, 그리고 깨달음을 설명하는 고도의 심리학을 다룬 경전이다. 나는 서광스님이 쓰신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유식 30송. 불광출판부>를 참고했다.


22)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 주어라. 달라는 사람들에게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말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안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받을 것을 알면 서로 꾸어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가 6:27~37) - 예수님의 너무나 아름다운 일성이어서 전문인용.


23) '챈팅'이라는 용어는 불교 용어가 아니라 기독교 용어이다. 영어 'Chant (詩唱)'의 어원인 '깐뚜스(Cantus)'에서 기원한 '챈팅'이라는 말은 성경(聖經)의 시적(詩的) 구절을 단조로운 리듬을 타고 기억하기 쉬우며 그 뜻을 잘 음미할 수 있도록 영창(詠唱)하는 소리와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24) “여러분이 만일 기도를 하려거든, 위선자가 하는 식으로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위선자는, 교회에서 사람이 보는 데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저들은 그것을 사람 때문에 하고, 그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바라는 것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기도를 하려고 생각하거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거기서, 아버지이신 자신의 영에게 기도하시오. 그러면 아버지, 당신이 영안에 있는 것을 보고, 당신에게 당신이 영안에서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요. 또 기도 할 때에는, 위선자와 같이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 여러분의 아버지는, 당신이 입을 열기 전에, 당신의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6:5~8)


25) <붓다는 없다. 스티븐 배철러. 이론과 실천> 65p


26) ‘붓다는 그의 이성이 그를 데려가는 극한까지 그 이성을 따랐으며’ 40p, ‘하지만 계몽주의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는 무신론적 유물론이 종교적 신앙 못지않게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데 있었다.’70p '우리는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단호하게 우리의 삶을 일일이 되짚어 보아야 한다.‘ 80p

   -물론 그가 115p 등에서는 명상이란 감수성을 이용한 탐색이라는 등의 말도 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관점이 이성줌심적으로 맞춰져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27) 전통적인 유식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8단계(‘안이비설신의’ 의 기본적인 육식에 마나식과 아뢰야식을 추가한 것)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데, <유식 30송>을 번역한 서광스님은 그 8개의 마음을 지켜보는 또 다른 의식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여, 나 또한 그 이론을 받아들인다.


28) 이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아니라, 나의 사유를 통해 추측해본 것이다. 그러나 서광스님이 생각한 유식의 이론이 옳다면, 나의 변연계 제어 이론도 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9) <전쟁의 역사. 버나드 로 몽고메리. 책세상>


30) <일월. 황순원. 문학과 지성사> 기룡의 말 중에서.


31)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하는 찬송가는 예수의 가르침을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바꾸어야 한다. 예수는 수동적인 사랑이 아닌 능동적인 사랑을 가르쳤다.


32) 유대인의 신화에서 야훼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창조의 여신.


33)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세계를 창조한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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