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한다. 그에 비해 이야기를 마친 김곱단 할머니의 표정보다 오히려 차분하다. 인터뷰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다. 태양이 아직 중천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하루하루 아스라하게 높아져서 태양은 며칠 전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김곱단 할머니는 몸을 일으키더니 부엌에서 감과 포도를 내어 온다. 단단하게 익은 감의 껍질을 깎아내며 담담히 입을 뗀다. 곱단 : 선생님, 놀라셨겠지요. 이 늙은이가 살아온 인생은 그 다음부터는 절망이 반이요, 목숨 부지가 반이었습니다. 내가 이 과도 하나를 손에 쥐게 되는 것만도 40년이 넘게 걸렸지요. 환갑이 되어서야 겨우 용기를 내서 칼을 손에 쥘 수 있었답니다. 매일 매일 밤마다 달콤한 꿈과 함께 그 마지막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
누군가를 용서해본 적이 있나요 곱단은 서둘러 그이를 깨웠다. 그이가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 이미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직감했다. 곱단은 그이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는 거예요. 죽더라도 우리 같이 죽는 거예요. 아시겠죠?! 곱단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이는 망설였다. 아니, 그보다는 자기 앞에 닥쳐온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곱단이 어제까지 알던 그이가 아니었다. 곱단은 흔들리는 그이의 눈빛을 바로잡으려는 듯이 그이의 손을 꼭 맞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밖에서 쿵!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두막집이 우르르 흔들렸다. 그이의 손은 더욱 더 떨렸다. 곱단은 그이를 품에 안고 어린애를 어르듯이 등을 ..
나는 : 다시 한 번 여쭤보게 되지만… 정말 무섭지 않으셨어요?곱단 : 뭐가요?나 : 아무리 당시 정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말씀하셨어도… 역시 그 분께서 갑자기 돌변해 살인귀가 된다든가, 아니면 정말 소문처럼 도깨비로 둔갑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곱단 : 무슨… 그런 건 외려 뒤에 덧씌워진 겁니다. 외려 그때엔 특별히 그런 건 없었죠. 그냥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미래의 모습 중 하나였을 뿐이었어요. 물론,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을 갉아 먹었지만… 나 어릴 적만 해도 한 동네에 사회주의 공부한다는 어른들이 여럿 계셨었죠. 전쟁 탓에… 북괴군이니 중공군이니 그런 공산주의를 믿는다는 자들이 일으킨 어리석은 죄 탓에 평범했던 것들을 더 이상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요. 이 나이가 ..
다섯 번의 낮과 다섯 번의 밤이 지나가는 동안 곱단과 그이가 오두막에서 보낸 시간은 닷새였다. 오두막 속에 있는 것은 그이가 아끼던 세 권의 책과 한 사람 분의 모포, 성냥 한 갑, 소련제 반합, 이 주일 분의 쌀, 고구마 대 여섯 개가 전부였다. 곱단은 특히 세 권의 책과 소련제 반합에 눈이 갔다. 책은 세 권 중 한 권은 소련어로, 한 권은 일본어로, 한 권은 언문으로 쓰여 있었다. 그이는 각각 레닌의 , 나쓰메 소세키의 , 황순원의 라고 소개했다. 그이의 말에 따르면 은 우리가 지향해야할 시대 이념을, 은 마음의 깊이를, 는 민족애를 대변해주는 책이라고 했다. 소련제 반합에 대해서는 간도에서 적군에 가담했던 시절부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이의 아버지는 소련 적군의 힘을 빌어 무장 강화를 꾀하고자 ..
나 : 할머님, 혹시 무섭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곱단 : 무섭기는... 나 : 그래도 당시로 치면 빨갱이라고 하면 피난민들한테 공포였을 텐데요. 뭐 흔한 예로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했다가 살해 당한 애 얘기 같은 건 저도 어릴 때 구구단 외우듯이 듣고 자랐거든요. 곱단 : 선생님이 전쟁을 몰라서 그래요. 나 : 아, 저 할머님. 선생님은 안 쓰시기로 하셨잖아요. 곱단 : 아 참, 미안해요. 나 : 아, 아닙니다. 곱단 : 전쟁 통에는 빨갱이고 연합군이고 없어요. 적어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나를 죽이려는 사람과 죽일 생각은 없는 사람, 그렇게만 나눠져요. 빨갱이라고 해서 있는 대로 사람을 다 죽이고 다닌 건 아니었죠. 마찬가지로 연합군이라고 사람을 다 살려준 건 아니었어.... 나 : 그랬군요....
고모부와 고모는 그이가 풀려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자꾸만 그이의 일을 묻는 곱단에게 고모부는 그 사람 일은 입에도 담지 말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잘못하다가는 일가족 모두가 끌려가 동반 사형을 당하는 일도 있던 때였다. 곱단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을 그때 처음 몸으로 실감했다. 아무 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라도 그이가 언제 죽었고, 어디에 묻혔다는 얘기만이라도 듣게 되길 바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이가 잡혀간 날 밤 곱단은 까닭없는 고열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결에 고모부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이가 군에 수송되어 가던 중 지프에서 뛰어내려 산으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산에 불을 놓을 것 같다고, 여기서는 겨울을 나기 힘들 것 같으니 곱단과 사위..
곱단 : 선생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나 : 네? 곱단 : 가슴이 너무 아파서 더는 못하겠어요. 나 : 가슴이 어떻게 아프신데요? 곱단 : 얘길 한다고 선생님이 어떻게 제 가슴 속을 알겠나요... 내일 다시 봅시다. 부탁드립니다. 나 : 아뇨, 할머님... 그렇게 머리를 숙이시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셔도 이건 안 되는 겁니다... 곱단 :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나 : 어유... 할머님, 알겠습니다. 근데 내일부터는 그 선생님 호칭도 좀 바꿔주세요. 제가 할머님보다 훨씬 덜 살았는데요. 특별기획으로 지면을 대거 할애하여 싣는 인터뷰도 아니고, 고작 한 페이지 정도가 할당되어 있을 뿐인, 잡지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인터뷰였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부장에게 항의 전화를 넣었을 테지만 ..
다음 날 선 자리에서 곱단은 건너편 청년이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제 본 노을빛만 떠올랐다. 곱단은 그이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말을 붙여봤으면 좋겠다. 고모는 시어머니가 될 청년의 어머니에게 그럼, 조만간 조촐하게 식을 올리자며 인사를 하고 제안했다. 곱단은 그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쟁 통에 천애 고아가 되어버린 자기를 거둬준 분들이었다. 더 이상 짐이 될 수도 없었고, 일찍 혼인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다들 그렇게 혼인을 하던 때였다. 밤새 곱단은 자기 옆에 그이를 놓아보고는, 저는 그이의 연인이 될만큼 신여성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이의 목소리는 한 번쯤 들어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남자와 결혼하여 여느 아낙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