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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11

멀고느린구름 2013. 10. 31. 04:17



나는 : 다시 한 번 여쭤보게 되지만… 정말 무섭지 않으셨어요?

곱단 : 뭐가요?

나 : 아무리 당시 정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말씀하셨어도… 역시 그 분께서 갑자기 돌변해 살인귀가 된다든가, 아니면 정말 소문처럼 도깨비로 둔갑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곱단 : 무슨… 그런 건 외려 뒤에 덧씌워진 겁니다. 외려 그때엔 특별히 그런 건 없었죠. 그냥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미래의 모습 중 하나였을 뿐이었어요. 물론,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을 갉아 먹었지만… 나 어릴 적만 해도 한 동네에 사회주의 공부한다는 어른들이 여럿 계셨었죠. 전쟁 탓에… 북괴군이니 중공군이니 그런 공산주의를 믿는다는 자들이 일으킨 어리석은 죄 탓에 평범했던 것들을 더 이상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요. 이 나이가 들어서야 나도 이제 목숨 걱정 않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어릴 적 나한테 살갑게 대해준 이웃들이 거진 사회주의 하겠다던 어른들이었어요. 그래서 전쟁 뒤에도 그네들이 싫지만은 않았어요. 함부로 그런 말은 입밖에도 내밀 수 없었지만. 

나 : 하지만 여전히 그런 말들은 우리 사회에서 편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겠죠. 

곱단 : 그렇게 되어버렸지요. 하지만 이제와 이 늙은이가 보안법으로 끌려간다고 해도 그 무슨 의미가 있겠나요… 그렇게 된다해도 마음에 못다한 말을 품고 한 세상 떠나는 일보단 낫지 않겠나요. 

나 : 끝끝내 못다한 말들을 품고 가시는 분들도 많겠죠. 

곱단 : 많겠지요. 셀 수 없이 많고 많겠지요. 난 가끔 뉴스에서 내 또래에 일본에 끌려 갔다온 그 할머니들 얘길 들으면… 이제 누가 눈을 감았다, 몇 명이 남았다 그런 얘길 들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요. 참 세상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런 원조차 풀어주질 못하고 보내는구나. 이 세상이 참 이리도 잔악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 : 우리 시대에 희망은 없을까요?

곱단 : 나 같은 일자무식 노파가 어찌 그런 걸 알겠나요. 그저 넋두리 하나 이렇게 덧붙이고 있을 뿐인데요. 

나 :  아닙니다. 이런 진솔한 고백들이 오히려 앞으로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는 큰 희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일부러 힘을 주어 말한다. 김곱단 할머니는 해사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 미소에서 아주 오래된, 그리고 굉장히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온 희망의 얼굴을 스쳐본다. 

 

  곱단이 잠드는 기색을 느낀 그이는 책을 읊는 소리를 서서히 줄이다가 책을 덮었다. 그이는 모닥불 빛이 어른거리는 곱단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곱단은 반쯤 잠든 가운데 그런 그이의 시선을 느꼈다. 혹여라도 입을 맞춰오면 어쩌나 싶은 걱정도 떠올랐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이는 한참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곱단은 안심한 가운데 점점 더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고마워요. 무서워도, 견뎌줘서…” 곱단은 그 말에 정신이 확 깨어났다. 눈은 그대로 감은 채였지만 손을 뻗어 그이의 한 손을 꼭 쥐고 답했다. 오른 손인지 왼 손인지는 잘 몰랐다. 그이의 손은 의외로 작고 차가웠다. 조금은 떨고 있기도 하였다. 곱단은 한 손으로는 그이의 손바닥을 감싸고 한 손으로는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이가 자신의 다른 편 한 손으로 손등을 쓰다듬는 곱단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곱단은 그 손마저도 꼬옥 잡아주었다. 차가운 그이의 손에 곱단의 온기가 옮아갔다. 그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이의 가슴이 곱단의 가슴에 닿더니 이내 입을 맞춰왔다. 말숙이에게 들은 서양식 키스는 아니었다. 찰나의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곱단은 제 속에서 무언가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곱단은 그이를 감싸 안고 어린애를 어르듯이 등을 토닥여주며 말한 것이었다. “전 당신 이름도 몰라요. 그치만 당신이 누구이든 좋아요. 그저 좋은 거에요.” 둘은 그대로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잠이 들었다.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더 없이 포근한 꿈들을 꾸었다. 




2013. 10. 3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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