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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14(완결)

멀고느린구름 2013. 11. 13. 05:16




나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한다. 그에 비해 이야기를 마친 김곱단 할머니의 표정보다 오히려 차분하다. 인터뷰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다. 태양이 아직 중천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하루하루 아스라하게 높아져서 태양은 며칠 전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김곱단 할머니는 몸을 일으키더니 부엌에서 감과 포도를 내어 온다. 단단하게 익은 감의 껍질을 깎아내며 담담히 입을 뗀다. 


곱단 : 선생님, 놀라셨겠지요. 이 늙은이가 살아온 인생은 그 다음부터는 절망이 반이요, 목숨 부지가 반이었습니다. 내가 이 과도 하나를 손에 쥐게 되는 것만도 40년이 넘게 걸렸지요. 환갑이 되어서야 겨우 용기를 내서 칼을 손에 쥘 수 있었답니다. 매일 매일 밤마다 달콤한 꿈과 함께 그 마지막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현실 속에서 나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이런저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꿈은 언제나 제자리였어요. 나는 평생을 같은 꿈 속에 갇혀 살았습니다. 

나 : 아… 할머님… 솔직히 지금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만은 안 할 수가 없겠어요. 할머님, 대체 왜… 그러니까 이제와서 왜 그 분을 찾으시나요?

곱단 : 왜긴요… 약조를 지키려고 찾는 게지. 

나 : 네?! 아니,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런 분에게 무슨 의리가 있으셔서 약조를 지키신단 말입니까. 

곱단 : 의리가 아니지요.

나 : 네?

곱단 : 의리가 아니지요. 이 맘에 이름을 붙이자면 사랑이라고 붙여야죠. 

나 : 사랑이라니요… 

곱단 : 다른 이름을 붙이기가 뭐하니… 사랑이라고 부를 밖에. 


녹음기를 쥔 손이 떨려온다. 마치 내가 그날의 일을 곱단을 대신해 겪고 있는 것 마냥. 찬 바람이 불어닥친다. 마당에 그늘이 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떼를 지어 오고 있다. 이내 하늘을 덮는다. 가랑비가 코스모스의 얼굴을 툭툭 때리더니 갑자기 쏴아 장대비가 쏟아진다. 김곱단 할머니는 홀가분한 미소를 머금고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본다.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누른다. 첫 번째 컷이 마음에 들지 않아 두 세 번 더 셔터를 누른다. 김곱단 할머니가 부끄러운 듯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다시 한 번 그 표정을 뷰파인더에 담는다. 비는 쉬이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깊은 한숨을 내쉰다. 


곱단 : 선생님, 걱정 마세요. 지나가는 비랍니다. 

나 : 그걸 어떻게 아세요?

곱단 : 어디 세상에 지나가지 않는 비가 있답니까. 

나 : …….

곱단 : 선생님… 누군가를 용서해 본 적이 있나요. 

나 : … 솔직히 말씀드리면 진심으로 용서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곱단 : 저도 그래요. 이 나이를 먹으면서 정말로 누굴 용서해 본 일이 없어요. 그래, 내가 왜 이렇게 고약한 늙은이가 되었나 생각해보니까… 거기서 막혀 있더라고요. 그런데 어제는 아주 좋은 꿈을 꿨어요. 그래서 오늘 내가 이렇게 맘이 편하고 절로 웃음이 나요. 

나 : 어떤 꿈을 꾸셨는데요?

곱단 : 그이를 용서하는 꿈이랍니다. 그리고 그이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꿈이랍니다. 


나는 녹음기를 이를 악물듯이 꽉 그러쥔다. 이내 온 몸에서 힘이 풀려나 녹음기를 놓치고 만다. 내 가슴 속에 쌓아올렸던 무언가가 무너져내린다. 나는 김곱단 할머니의 품 속에서 목놓아 운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소리친다. 내 울음이 잦아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빗줄기도 서서히 여위어 갔다. 더 없이 높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고, 나는 김곱단 할머니의 마지막 육성을 담을 수 있었다. 


곱단 : 모쪼록 그이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번엔 만나면 좀 더 오래 숲길을 걸읍시다. 





2013. 11. 1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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