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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7

멀고느린구름 2013. 10. 11. 21:45




곱단 : 선생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나 : 네?

곱단 : 가슴이 너무 아파서 더는 못하겠어요. 

나 : 가슴이 어떻게 아프신데요?

곱단 : 얘길 한다고 선생님이 어떻게 제 가슴 속을 알겠나요... 내일 다시 봅시다. 부탁드립니다. 

나 : 아뇨, 할머님... 그렇게 머리를 숙이시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셔도 이건 안 되는 겁니다... 

곱단 :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나 : 어유... 할머님, 알겠습니다. 근데 내일부터는 그 선생님 호칭도 좀 바꿔주세요. 제가 할머님보다 훨씬 덜 살았는데요. 


특별기획으로 지면을 대거 할애하여 싣는 인터뷰도 아니고, 고작 한 페이지 정도가 할당되어 있을 뿐인, 잡지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인터뷰였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부장에게 항의 전화를 넣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크고 아름다운 보름달을 보았다.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받아본 저녁밥상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밥상을 내어주고 싶은 밤이다. 향할 곳을 잃은 마음은 길을 떠났다가도 이내 내 자신에게로 돌아 우뚝 섰다. 우뚝 우뚝 서 있는 마음들을 피해 겨우 집에 도착한다. 달빛은 내가 사는 집 안에도 들어차 있다. 창을 활짝 연다. 보름달은 동네의 하늘에도, 곱단 할머니의 정원에도, 61년 전의 부산에도 떠있었다. 




당신이 누구이든 



   꿈 속에 헤어진 연인이 나와 잠을 설쳤다. 마지막 시기의 우리는 만나면 서로 다투기만 했는데, 꿈 속에서 우리는 첫 순간들처럼 다정했다. 운명적인 사랑이란 ‘화학’을 가장 미화시켜 이르는 말이 아닐까. 인간은 어찌되었든 무리를 이루고 살지 않으면 극심한 외로움의 형벌을 받도록 설계된 동물이고, 가능한 화학작용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질 시기에 적절한 짝을 만나 ‘무리’를 짓는 것이 안정된 삶의 정석 코스일 것이다. 시중에는 정석 코스를 밟기를 바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종류의 지침서들이 즐비하고, 썩 효력이 좋은 것도 많다. 나 또한 그 책들 중의 하나를 참고하여 헤어진 연인을 유혹했고, 연인은 매뉴얼대로 유혹 당했으며, 화학작용이 활발할 때는 뜨겁게, 작용이 정지한 이후에는 많은 연인들이 그렇듯 갖가지 난관에 봉착하며 관계를 이어나갔다. 3년 째라는 시기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다. 3년 째는 45%이상의 연인이 더 나아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기이다. 우리는 그 시기를 맞았고 후자를 선택했다. 이 모든 과정은 내가 처음 연인을 유혹할 때 읽었던 책에 쓰여 있던 그대로였다. 지나치게 정석 코스를 밟아 허무할 지경이었다. 내가 괴로워한 것은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 탓이 아니었다. 그녀와 헤어진 다음 날부터 마음 속에서는 슬픔도 분노도 아닌, 허무가 차곡차곡 쌓였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허무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그리운 것이 없었다. 세상의 아무 것도 아름답지 않았다. 길을 지나는 젊은 여자들을 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아 보였다. 문득, 나 자신의 삶을 돌아봤다. 누구와도 하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구나, 어딘가의 책에 분명 쓰여 있을 법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새롭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었다. 앞으로 내가 만날 당신이 누구이든 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었다. 하지만 김곱단 할머니는 그 푸른 청춘으로부터 61년이나 지난 후에 자신의 삶을 바꾸어 보려 하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세안을 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잠깐 동안 뉴스를 검색한 후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선다. 집 앞에 그 전에 보지 못하던 코스모스 화분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고개를 수그린 것이 다소 안쓰러워 보인다. 김곱단 할머니의 집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김곱단 할머니는 어제와 같은 차림이다. 그러나 허름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여전히 단정하고 곱다. 할머니가 내어준 연잎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누른다. 김곱단 할머니는 불현듯 떠오르지 않는 단어를 찾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감고 기억 속을 더듬는다. 침묵이 흐른다. 잠시 뒤 할머니의 미간이 스르르 풀려난다. 이야기가 이어졌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대표는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단상에 오른 대표는 당신들 속에 숨어든 빨갱이가 있을 거라며 이틀 내에 색출하지 않으면 모두를 잡아다 고문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마을별로 반드시 2명 이상의 빨갱이를 색출해서 보고하도록 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소문이 주민들 사이에 돌았다. 기한이 지나치게 짧았다. 이장단은 재빠르게 마을에서 구걸을 하며 먹고 살던 바보를 빨갱이로 지목했다. 전쟁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 많이 파괴했다. 나머지 한 명이 문제였다. 다행히 바보를 빨갱이로 지목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나왔다. 그이였다. 이장은 그이의 책방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책이 발견되었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이는 민족 화합을 추진했을 뿐인 몽양 선생이 어째서 빨갱이냐고 반론했다. 전쟁 중이었다. 몽양 선생마저 때에 따라서는 빨갱이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군은 바보와 그이를 체포했다. 형벌은 정해져 있었다. 사형이었다. 



2013. 10. 1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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